빛의 결을 다듬는 분, 허만길 스승께 ㅡ 청람

김왕식








빛의 결을 다듬는 분,
허만길 스승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진정한 스승은 제자의 내일을 먼저 본다.
허만길 선생은 그런 분이다. 제자를 자식처럼 품되, 사랑은 깊고 보듬음은 따뜻하다. 그러나 그 품 안에 안주하라 말하지 않는다. 한 송이 꽃이 되기 위해, 뿌리 깊은 자리부터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일찍이 깨달아 알고 있다.

문학 앞에서는 단호하다.
가르침은 온유하지만, 시 앞에서는 엄정하다.
말이 곧 사람의 혼이라면, 시는 사람의 뼈와 심장으로 쓴 기록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꿰뚫고 있었다. 그런 선생 앞에서 시는 결코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시 한 편 쓰기 위해 시집을 키만큼 쌓으라 하고, 수천 편의 시를 통과한 눈과 귀, 손끝으로만 언어의 결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무거운 요구이기 이전에, 문학을 향한 절절한 예의이자 헌신이다.

그 길은 곧 스승의 길이었다.
허만길 선생은 평생 시를 품에 안고, 말의 칼날을 스스로 갈아오신 분이다. 시는 그의 손에서 연마된 옥처럼 맑았고, 언어는 그의 숨결 속에서 단정한 결로 다듬어졌다. 쉬운 말을 쓰되 결코 얕지 않았고, 짧은 시를 쓰되 그 여운은 심연처럼 깊었다.

스승은 흔히 등불이라 비유되지만, 허만길 선생은 등불을 넘어 제자의 그림자까지 환히 비추는 햇살이다. 그 햇살은 따스하되 눈부시지 않고, 명징하되 강요하지 않는다.
때론 해묵은 말들을 벗겨내는 칼이 되어 제자의 언어를 벼리게 하고, 때론 깊은 침묵이 되어 그들의 침전 속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묵묵히 지켜보신다.

문학의 길은 광야를 맨발로 걷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제자들 앞에, 그는 물 한 바가지 건네는 우물이 되고, 등 뒤에서 불어오는 격려의 바람이 된다. 누구도 쉽게 시인이 될 수 없으며, 쉽게 시를 쓸 수 없음을 그는 삶으로 증명해 보이셨다. 절차탁마, 언어를 다듬는 일이 곧 자신을 깎는 일이라는 가르침은 제자들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장으로 남는다.

하여 허만길 선생의 문학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이자, 하나의 도(道)다.
시는 단지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 한 줄의 시어는 삶의 뼈대를 담아야 한다는 자각은 그의 가르침 안에 늘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이제 제자들은 안다.
그가 권한 수천 편의 시는 단지 읽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되어가는 시'였다.
그 시집들은 곧 내 안에 쌓아야 할 성찰의 탑이었고, 그 안에 깃든 정신은, 삶을 향한 단단한 시적 감식안과 생의 겸허함이었다.

허만길.
그 이름은 단지 한 명의 시인을 넘어, 언어를 빚는 장인이며, 사람을 키우는 선각자이다.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 있는 시의 본보기가 된다.

오늘도 우리는 그 말씀을 기억한다.
“시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며, 마음은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

그 믿음의 길 위에서 우리는 시를 배우고, 삶을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스승의 등 뒤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아마도 허만길 선생 또한
그의 젊은 날,
이와 같은 가르침을 준 스승을 만났으리라.
그로부터 받은 엄정한 사랑, 고요한 빛, 언어의 윤리.
그 모든 것을, 이젠 선생의 숨결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스승이었던 그에게서,
스승이 되어가는 삶으로.
그의 시는 그렇게 물리고, 또 피어난다.



빛은 다시 빛을 낳는다
― 허만길 스승께




김왕식



어느 날 내 등 뒤로
작은 햇살 하나가 따라왔다
말없이 길을 비추고
그 침묵은 빛보다 먼저 따뜻했다

시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라 하셨고
마음은 정직해야 한다고
구부러진 단어는 버리고
한 줄 시를 얻기 위해
수천 권 시집의 골격을 뒤적여야 한다고
숨처럼 낮고 깊은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등불이 아니었다
스승은 내 그림자까지 덮는
아침 햇살이었다
고요히 내 안의 얼음을 녹이고
숨겨둔 울음을 먼저 알아채셨다

내가 시를 알기도 전에
그분은 시의 깊이를 살고 계셨고
내가 길을 물으려 할 때
이미 먼 곳에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나는 한 줄 시를 쓰기 전
한 사람을 먼저 배웠다
시보다 아름다운 삶
그것이 그의 시였고
그가 걸어온 문장이었다

오늘 나는 이제야 안다
그 빛은 어디서 왔는지
그분 또한 젊은 날
한 스승의 빛 아래 서 계셨으리라

절차탁마의 밤을 지나
한 자 한 획의 침묵을 익히며
그 빛을 건네받았으리라

그리고 이제
내가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을 마주칠 때
그분의 등불 하나
또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2025, 7, 9, 수



제자 김왕식 드림


□ 허만길 선생과 그의 스승 최현배 선생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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