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물레방아는 멈췄다
(흔들림의 멈춤)
시인 변희자
꽃길 가시밭길
떼어내듯 지워버리고
비수처럼 꽂힌 말을
한숨 섞어 내보냈다
혼자라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주문처럼 되뇌며
시나브로 나를 지켜내며
여기까지 왔다
허울뿐인 다정함에
더는
뒤돌아보지 않으리
내가 머물 수 없는 곳
떠나온 그 자리—
내 흔적이 사라진 자리
수목원 물레방아는
더는
돌지 않으리
■
고요한 단절의 힘, 침묵의 선언
― 변희자 시인의 '물레방아는 멈췄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변희자 시인의 '물레방아는 멈췄다'는 관계와 감정의 반복 회로에서 벗어난 한 존재의 내면적 결단을 담담하면서도 강인하게 그려낸 시적 선언문이다. ‘흔들림의 멈춤’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이 시는 끊임없이 회전하던 삶의 톱니를 멈춰 세우는 순간의 정적과, 그로 인해 찾아온 새로운 자기 주체의 회복을 노래한다.
시의 첫 행 “꽃길 가시밭길 / 떼어내듯 지워버리고”는 삶의 기억과 감정, 좋았던 것과 아팠던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떼어낸다’는 과감한 표현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망각이 아니라 초월이다. 기쁨과 상처를 구분하지 않고 통째로 내려놓는 태도는, 시인이 지닌 존재적 미학이자 삶에 대한 비연애적 자세를 보여준다.
“비수처럼 꽂힌 말을 / 한숨 섞어 내보냈다”는 구절에서 시인은 언어가 남긴 상흔을 조용히 토해낸다. 상처를 직시하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냉철하게 응시하며 ‘한숨’이라는 침묵의 숨결로 이입시킨다. 시인은 감정의 격랑 속에서 ‘무너짐’이 아닌 ‘지켜냄’의 쪽으로 걸어 나아간다. “혼자라도 괜찮아 / 정말 괜찮아”라는 대목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자기를 단련한 내면의 독백이며, 외롭지 않다는 허세가 아닌 고독을 감내할 줄 아는 성숙한 자각이다.
“허울뿐인 다정함”에 대한 단절은 이 시의 핵심적인 전환점이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단언은 애틋함의 여운 없이 깔끔하고도 단호하다. 떠난 자의 미련도, 남은 자의 책임도 떠안지 않겠다는 선언은 시인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적 절연’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정리이고, 도피가 아닌 회복이다. 변희자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이 머물 수 없는 자리를 인정하고, 떠남을 통해 되찾는 평온을 노래한다.
결국 “수목원 물레방아는 / 더는 / 돌지 않으리”는 시의 마지막이자, 시인의 철학이 도달한 미학적 결론이다. 물레방아는 반복의 상징이자 과거의 회전이다. 그것이 멈췄다는 말은 곧 반복되는 고통의 연쇄를 끊고, 자기감정의 회로를 닫았다는 뜻이다. 물 흐르듯 끊임없이 돌아가던 감정과 관계의 물살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간과 고요를 회복한 시인의 정적은 무력감이 아니라 선택된 고요이며 의식적 단절의 힘이다.
변희자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관계의 해체가 곧 새로운 존재의 재구성임을 역설한다. 그녀의 삶의 철학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으며, 상처의 한복판에서 침묵의 언어로 자신을 지켜내는 데 있다. 과거와의 절연은 슬픔이 아닌 자유로 향하는 문이 된다. 그녀는 고통의 언어로 해방을 노래하고, 멈춤이라는 정지 속에서 진정한 삶의 재출발을 꿈꾼다.
'물레방아는 멈췄다'는 단순히 이별이나 단절을 말하는 시가 아니다. 이 시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적 층위를 정제된 언어로 벼려낸, 감정의 침묵이자 자아의 회복 선언이다. 물레방아가 멈춘 자리에 다시금 피어날 고요한 생명의 언어가, 이 시의 여백에 숨어 있다. 시인은 멈춤을 통해, 그 어떤 격정보다 더 단단한 자기 확신의 울림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