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바닷가에서
* R. 타고르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 같이 고요한 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로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오가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지 않고
그물 던져 고기잡이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사람과 배 송두리째 삼키는 파도도
아가 달래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들려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놉니다.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 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
타고르
출생 1861.05.07. 인도
사망 1941.08.07.
가족
배우자 바바타리니, 아버지 데벤드라나트 타고르, 형 조티린드라나트 타고르
학력
옥스퍼드대학교 명예박사
수상
1913년 노벨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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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존재의 순수성
― 타고르의 '바닷가에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 '바닷가에서'는 인생의 본질을 아득한 바다의 은유로 풀어내며, 존재와 놀이, 순수와 무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적으로 조망한 작품이다. 이 시는 단지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풍경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타고르 특유의 영혼 철학이 언어의 가장 맑은 결을 통해 독자의 심연을 향해 조용히 스며든다.
시의 첫머리는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라는 반복적인 구조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득한 나라’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관념적·존재론적 공간이다. 인간의 본성, 혹은 신의 창조 이전 상태에 가까운 순전한 차원이다.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바다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우주의 심장을 닮은 유영의 시원(始原)이며, 아이들의 ‘놀이’는 그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창조 행위와도 같다.
이 시에서 타고르는 바다를 상징으로 삼는다. 바다는 무한의 상징이며, 또한 생명과 죽음을 삼켜내는 거대한 세계다. 그러나 이 무서운 바다조차, 아이들과는 “깔깔거리며” 논다.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죽음을 품은 바다가 웃는다는 이 표현은 역설적이되, 인간 삶의 근원에 자리한 사랑과 온정의 시선이다. 그 어떤 위험과 허무조차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는 자비롭고 노래하는 존재로 바뀐다.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조개껍데기를 줍고, 나뭇잎 배를 띄운다. 그들은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법도 모른다. 이는 물질적 탐욕이나 생존의 계산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무위한 존재의 표상이다. 타고르는 이 무지를 ‘결핍’이 아닌 ‘축복’으로 본다. 모르는 것이야말로 삶을 가볍게 하고, 오히려 신에게 가까워지게 만드는 통로임을 시인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고기를 잡지 않아도, 그물도 없이도, 이미 바다는 아이들의 친구가 된다.
또한 시의 말미에 이르면,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라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 표현은 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신비한 무게를 드러낸다. 아이들은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논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삶의 본질이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때, 삶은 가장 충만하고 가장 자유롭다. 이는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여정을 놀이처럼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타고르 특유의 실존적 통찰이다.
타고르의 작품 세계는 늘 ‘삶은 곧 신을 향한 놀이’라는 철학 위에 놓여 있다. 그는 신을 경배하면서도 신 앞에서 기쁨을 잃지 않는다. 인간의 무지를 지적하면서도 그 무지 속에 숨어 있는 깨달음을 본다. 이 시 역시 그러하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지만, 그 안에 모든 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아이들의 웃음은 세계의 울림이고, 그들의 놀이야말로 존재의 찬미다.
'바닷가에서'는 정적인 사색이 아닌 유희의 역동 속에서 인간 본질을 노래하는 시다. 이 시 속 아이들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타고르가 염원한 궁극의 인간형이자 영혼의 거울이다. 순수함이 삶의 목적을 대신하고, 무위가 진리를 부르는 세계. 그곳이 바로 타고르가 꿈꾼 시의 바닷가이며, 그가 몸소 살아낸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 시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그대는 언제 마지막으로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던지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웃어보았는가?"
그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 잔물결을 남긴다면,
우리는 여전히 시인의 부름 안에 있다.
□
바닷가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김왕식
물결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듣고 있었다
깊은 하늘에서 바람이 내려와
모래성을 흔들어 놓아도
그들은 웃었다
조개껍데기 한 쪽
햇살 닿은 조약돌 하나
마른 나뭇잎을 접어 만든 배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겐 우주였다
배는 흔들리고
죽음은 물 위를 맴돌았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놀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꾼은 돛을 올리고
진주잡이는 숨을 참지만
그들은
바람을 잡지 않고
물고기를 찾지 않았다
그저 깔깔 웃고
파도를 손등으로 쓸며
하늘을 따라 눈을 떴다
바다는 아이들의 어머니처럼
끝없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늘도 나는 묻는다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나에게
너는 언제 마지막으로
모래를 쥐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웃었는가?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