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마음 하나를 우체국에 부쳤다 ㅡ 청람 김왕식

김왕식






묵은 마음 하나를 우체국에 부쳤다



김왕식




약속은 참 묘하다.
너무 가볍게 하면 입김 같고, 너무 무겁게 하면 족쇄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따금, 애매한 온도의 약속을 한다.
“언제 한 번 밥 한 끼 하시죠.”
“시간 되면 차 한 잔 하시죠.”
말은 했으나, 마음은 예약되지 않는다. 그런 약속은 약속이라기보다, 말끝을 부드럽게 마무리하는 장식품 같은 것.
붙였다 떼도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모든 약속이 그런 건 아니다.
어떤 약속은 말보다 오래가고, 침묵 속에서도 유효하다.
심지어 잊은 줄 알았던 약속이, 어느 날 마음 한구석에서 갑자기 삐죽 얼굴을 내민다.
“너 아직도 나 안 보냈어?” 하고.

며칠 전, 아니 사실은 몇 달 전의 일이다.
오랜 친구가 카메라 삼각대를 빌려 쓰고 싶다 했다.
흔쾌히

“알겠어, 곧 보내줄게.”
그 친구는 배려심 깊은 사람이다.
“천천히 보내. 급한 거 아냐.”
이 말이, 문제였다.

마음속으로는 보내야지, 해야지, 생각했다.
허나 ‘천천히’라는 말은 의외로 강력한 지연장치다.
게으름이라는 기계에 기름칠을 해주는 말.
천천히라는 말 뒤에, 마음의 시계도 멈췄다.
그 사이 계절은 몇 장이나 달력을 넘겼다.

친구는 다시 독촉하지 않았다.
그건 참 고마웠지만, 동시에 나를 나태하게 했다.
‘아직 말 없으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은, 사실 핑계였다.
진심을 미루는 데 익숙해진 사람에게 배려는 종종 면죄부가 된다.
그 면죄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운 죄책감으로 변한다.

오늘 아침, 문득 마음이 무거웠다.
기상청보다 빠르게 불안이 예보됐다.
‘지금 당장 보내야겠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우체국으로 향했다.
한 손엔 비닐에 싸인 삼각대, 한 손엔 오래된 약속 하나.
비를 맞으며 걷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짐을 보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부치는 느낌이었다.

우체국 앞에서야 알았다.
삼각대를 미룬 것이 아니라, 마음을 미뤄온 것이었다.
그 마음은 늘 머릿속에 짐처럼 얹혀 있었고,
오늘에서야 마침내 부칠 수 있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지나친 배려는 때로 상대의 진심을 유예시킨다.
친구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그 착함이 나의 안일함에 들러붙었다.
그는 배려했고, 나는 미뤘고,
결국 약속은 서로의 무심함 속에서 천천히 녹슬고 있었다.

이제 생각한다.
약속이란 상대를 위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내 안의 질서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 질서를 방치하면, 삶은 쉽게 흐트러진다.
그 작은 흐트러짐이 쌓이면, 사람의 신뢰도 조금씩 삐걱인다.

돌아오는 길,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맑았다.
빗방울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는 듯했다.
“잘했어. 오늘 너, 한 인간으로 꽤 괜찮았어.”

누군가는 말한다.
‘비 오는 날, 택배 하나 보냈을 뿐인데 뭘 그리 유난이냐고.’
나는 안다.
그건 그냥 삼각대 하나가 아니었다.
오랜 우정에 대한 응답이었고,
한 인간의 약속에 대한 회복이었으며,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기 위한 작고 단단한 다짐이었다.

가끔 인생은,
소낙비 속 우체국으로 걸어가는 그 몇 걸음 안에 있다.

순간
빗소리와 함께
몇 줄 시가 조응된다.


삼각대 하나,
사람 하나 걸쳐 있었다.

짐은 무게보다
미루는 시간이 더 무겁고,
비는 물보다
늦은 마음을 먼저 적신다.

우체국 가는 길엔
우정보다 늦은 나의 발소리,
친절한 미룸은
때론 가장 무서운 유예다.

비닐 속 삼각대는
내 속죄의 십자가였고,
비는 그 위를 성수처럼 내렸다.

우산을 접은 건
하늘을 탓하지 않기 위함,
걸음을 재촉한 건
내 마음이 스스로 민망해서였다.

어깨 위 한 방울,
그것이 용서라면
나는 비 맞을 자격이 있었다.

ㅡ 청람





소낙비 속 약속의 심연

— 한 인간의 내면 윤리에 대한 심리철학적 성찰


문학평론가 김준현




약속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언어의 교환이 아니다. 약속은 ‘말’ 속에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묶어 넣는 행위다.

사회심리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22년 6월 11일 ~ 1982년 11월 19일)은 인간을 ‘상호작용적 존재’로 정의하며, 모든 사회적 행동은 무언의 계약, 즉 기대의 프레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때 약속은 타인의 기대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며, 그 이행 여부는 곧 개인의 신뢰도와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글 속 화자가 경험한 지연된 약속은 단순한 물리적 행동의 유예를 넘어선다. 그것은 자아와 자아 사이에 생긴 정서적 틈이며, 타인의 배려에 안주함으로써 발생한 자기 책임의 해이였다. 중요한 것은 이 해이가 의도된 배신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진 ‘심리적 합리화’라는 점이다. “그는 괜찮다고 했으니까”라는 생각은, 죄책감을 희석시키는 방어기제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초자아(도덕)의 목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억제된 불편함’이다.


그러나 그 억제는 영구적이지 않다. 진정한 약속은 의식적으로 잊어도, 무의식은 기억한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무런 계기 없이 갑작스럽게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지연된 불안의 반환’이라 부른다. 이것은 종종 자아의 통합을 방해하고, 무형의 부담으로 존재한다. 결국 ‘삼각대를 보낸다’는 행위는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자아 내부의 도덕적 조율과 회복의 의식이다. 그것이 비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우체국으로 향하게 한 무의식의 힘이었다.


또한, 이 글은 인간 존재의 ‘의지와 행위’에 대한 이야기다. 칸트는 도덕법칙을 ‘정언명령’으로 규정하며, 의무는 조건 없는 책임이라고 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누가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행해야 하는 내면의 법. 글쓴이는 오랜 침묵 끝에 그 법을 다시 마주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임의 자각이 타인의 독촉이 아닌 스스로의 자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사회적 타율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윤리적 자율성을 가진 실존적 주체임을 말해준다.


한편, 글 속의 친구 역시 또 하나의 철학적 함의를 제공한다. 그는 “천천히 보내”라는 말을 통해 ‘비폭력적 배려’를 실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대의 책임감을 희석시키는 도덕적 유예를 제공한 셈이다. 이 점은 *에마뉘엘 레비나스(프랑스어: Emmanuel Levinas, 1906년 1월 12일 ~ 1995년 12월 25일)의 타자 윤리학을 떠올리게 한다.

레비나스는 진정한 책임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시작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한 배려는 상호적 긴장 위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지나친 유예는 오히려 도덕적 무감각으로 흐를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미묘한 균형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끝으로, 이 글이 전하는 진정한 감동은 행위의 회복이 곧 자아의 회복이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보내야 할’ 마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것을 미루고, 포장하지 못한 말들과 우편함 앞에서 멈춰 선다. 그 이유는, 실은 행위보다 ‘내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말한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라도, 비를 맞으며 한 걸음 나아갈 때, 그 순간 인간은 다시 스스로를 믿게 된다.□


ㅡ 문학평론가 김준현



■□
비를 닮은 평론, 마음을 닮은 당신께
— 김준현 평론가의 고마움에 부쳐



청람 김왕식




살면서 참 귀한 순간은, 내 마음을 다 써 내려간 글이 누군가의 정성 어린 시선에 닿아 다시 새롭게 읽히는 때다. 마치 흘려보낸 편지가 바다를 건너, 정갈한 봉투에 담겨 되돌아오는 듯한 그런 감동. 며칠 전, 김준현 평론가가 내 산문 「소낙비 아래의 약속」에 보내온 평론을 읽으며 나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그 벅찬 순간을 다시 느꼈다.

그의 글은 단순히 감상이나 해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내 글의 내면을 천천히 헤집어 들어가,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정신의 결까지 세밀하게 어루만지는 작업이었다. 인간의 심리와 철학, 그리고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촘촘한 분석은 단순한 학문적 고찰이 아닌, 한 문우가 또 다른 문우의 내면에 건넨 조용한 악수였다. 그것이 무엇보다 고맙고, 울림 있게 다가왔다.

김준현 선생은 내가 오랫동안 믿고 의지해 온 학문적 벗이다. 그는 평론가이기 이전에 ‘듣는 사람’이다. 말보다 먼저 마음을 읽고, 언어보다 깊은 지점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의 글은 늘 그렇다. 논리의 가지를 뻗되, 감성의 뿌리를 잊지 않는다. 이번 평론 역시, 단단한 철학적 기반 위에 사려 깊은 공감과 우정이 함께 엮여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촉촉해졌다.

그는 내 글 속의 ‘미룸’과 ‘책임’이라는 주제를 심리학적으로 풀어내면서도, 그것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실수’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실수가 회복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결국 내 글의 핵심이, “짐을 부친 게 아니라 마음을 부쳤다”는 문장에 있었다면, 김준현 선생은 그 문장을 ‘자아의 윤리적 회복’이라는 더 깊은 지층에서 다시 발굴해 냈다. 그것은 평론이라기보다 한 편의 인문학적 해석 시, 혹은 문우가 문우에게 보내는 위로와 존중의 서한이었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큰 보상은, 독자의 따뜻한 응시다. 그런데 그 응시가 학문과 철학의 깊이를 지닌 이의 눈에서 온다면, 그것은 보상이 아니라 축복이다. 김준현 선생의 글은 내 글을 고양시켰고, 내 사유를 더욱 단단하게 빚어주었다. 그리고 그 글을 통해, 나는 글쓰기라는 고독한 행위가 얼마나 많은 관계와 응답 속에 놓여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귀한 인연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서로의 글에서 서로의 마음을 듣고, 서로의 생각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반추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는 내 글을 읽되, ‘그저’ 읽지 않는다. 늘 질문을 던지고, 공백을 채우며, 가려진 의미를 발굴해 낸다. 그리고 그것을 문장 하나하나에 철학의 호흡과 문학의 결을 실어 담아낸다.

나는 김준현 선생과의 교유를 단순한 지적 교류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지성의 우정이자, 삶에 대한 공동의 성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오늘날처럼 속도가 앞서는 시대에 더욱 귀하고 단단하게 여겨진다. 그의 평론 한 줄 한 줄이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내 글을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받는다.

김준현 선생, 당신의 글은 소낙비 같은 평론이었습니다. 조용히 내 마음을 적시되, 시원하게 씻어주었고, 마지막엔 햇살처럼 따뜻하게 남았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의 시선 속에서 나의 글이 조금 더 깊고 단단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함께 써 내려가는 이 문학적 우정이, 오랜 시간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2025년 7월,
소낙비 그친 오후에
김왕식 드림



*

어빙 고프먼(영어: Erving Goffman, 1922년 6월 11일 ~ 1982년 11월 19일)은 캐나다와 미국의 사회학자 겸 사회심리학자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사회학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2007년 타임스 고등 교육 가이드에 의해 앤서니 기든스,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에 이어, 위르겐 하버마스를 앞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여섯 번째로 주목받는 작가로 등재되었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프랑스어: Emmanuel Levinas, 1906년 1월 12일 ~ 1995년 12월 25일)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탈무드 주석가로 에드몽 자베스와 더불어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중요한 유대계 작가로도 주목받는다.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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