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임준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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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침안정법五鍼安定法
시인 임준빈
사각달에게 침을 놓았다
반듯한 그리움을 오래 만져서일까 일그러진 한탄이 주춤거린다.
바람의 날개 부러뜨리고
희미한 창문 틈새로 내민 햇빛의 옷을 잡아당겨
천년을 두드린 별들의 한숨도 끌어 뉘어야겠다
고국을 향한 밀애의 달빛
앞장 쫓긴 직지 하권에 비친 향수의 그을음
소실된 상권, 상한 영혼을 화석으로 변절한 위패
서른여덟 마디마다 직지의 울음 홀로 고였다.
닥나무 숲에 흐르는 피돌기
아직도 그 온기가 문어 있고
묵은 향기 천 년의 구김살도 펴지 못해 정교한 오침五鍼을 찌르자
화현化現하는 송곳 끝에 눈이 생겼다
가도 가도 손잡을 길 없는
이력의 강물 뿌리는 어디에서 만날까 누우런 꽃이 피려다 진
허둥대는 사리꽃 같은 봉돌을 안아
한 뜸 한 뜸 숨결 꿰어 깁는 고서 장정裝訂의 순례
껍데기만 소유한 욕심의 창틀 속에 맑은 정심 피눈물로 고독하여라 금속활자가 빚어 놓은 검은 물밑 약속 게송의 언어로 해금解禁하는 흥덕사 풍경 제 몸 씻으려 솔바람에 옷깃을 다독인다.
작금,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뚫어주는 중
직지여 슬퍼하지 마라
깊을수록 엄습하는 예리한 이빨은 칼끝보다 향기롭나니
살 속 끝에서 이글대는
촛불 한 송이 잎새에 걸린 낮달은 직지의 일깨움 맑히려
뼈에 새긴 흰 글씨들의 완장이다
마음자리
깨달음을 두드리는 청정한 진리
혼만 빼다 손질하는 검증된 홀수의 손 신이 건넨 혜안의 그림자를 딛고 안정된 인간의 손가락 다섯 수를 어찌 가슴에 품었을까
선조들의 지혜가 푸른 구름으로 구르고 과학적 통찰의 신비가 산을 넘는구나.
오오, 눈부신 민족혼
노을에 묶였던 직지심체요절
고국을 향해 해산의 몸짓 꿈틀댄다
팔천 년, 바람이 몰고 온 구름의 언어로
숨 쉴 수 있다는 한지의 끈질긴 수명 지단한 역사의 운명을 자침自沈하듯 묵향으로 침묵한다.
비우고 비워 내려 초연히 물든 가을 뒤란에
저피楮皮의 억겁 풀어놓은 채
고서를 정성으로 여미는 과정은
마치, 선승이 비장미를 깨치어 팔만대장경을 다라니하듯
마음을 잘 묶는 일,
그윽한 수행 정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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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일본, 인도는 사침안정법을 많이 사용했으나 우리 민족은 가장 안정적인 신의 손가락 다섯 수 오침안정법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우리 민족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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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빈 작가의 「오침안정법五鍼安定法」
― 직지를 통한 민족혼의 정제와 신의 지혜를 꿰맨 시적 장정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임준빈 시인의 「오침안정법五鍼安定法」은 ‘직지심체요절’을 단순한 고문헌이나 문화재로 보지 않고, 그것을 민족의 정체성과 영혼을 묶는 ‘오침의 손가락’으로 바라보는 천재적인 통찰의 결정체다. 시인은 책의 다섯 묶음 매듭을 오침安定의 시공적 비유로 전개하면서, 이 민족의 상처와 기다림, 침묵과 깨달음이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응축되는지를 정묘한 시적 언어로 풀어낸다.
첫 행 “사각달에게 침을 놓았다”에서 시인은 직지의 사각四角형상을 ‘달’이라는 우주적 상징과 겹친다. 그것은 정결한 그리움의 형태이며, 빛의 언어다. 달에 놓는 침은 단지 바늘이 아니라, 민족의 응어리를 푸는 신성한 손길이다. 이 바늘은 일그러진 한탄을 “주춤거리게” 하며, 단지 아픔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그 아픔을 조용히 다독이는 진리의 촉수다.
2연의 “바람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햇빛의 옷을 잡아당기”는 장면은, 거대한 시대의 질곡 속에서 사라져 간 진실을 다시 끌어내려는 시인의 간절함이다. “별들의 한숨도 끌어 뉘겠다”는 구절은 역사의 침묵, 망각된 고통마저도 한 줄의 글로 봉합하려는 시적 의지로 읽힌다.
이때 직지는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천년을 눌러온 슬픔의 결정이며, “향수의 그을음”과 “소실된 상권”은 곧 망각된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다.
“닥나무 숲에 흐르는 피돌기”는 백지의 근원이며, 우리 종이의 숨결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한지의 질감 속에서 피돌기를, 곧 생명 순환을 읽어낸다. “정교한 오침을 찌르자 화현하는 송곳 끝에 눈이 생겼다”는 구절은, 단지 책을 묶는 기술이 아닌, 진리와 역사의 눈을 새로 여는 영적 행위로 묘사된다.
5연의 “손잡을 길 없는 이력의 강물”은 흐르는 역사 속에 고립된 자아의 정체성 탐색이며, “허둥대는 사리꽃 같은 봉돌”은 역사적 의식의 혼란을 의미한다.
이 사리꽃(상사화)은 본래의 자리를 잃은 존재이며, 봉돌처럼 눌려 있던 기억들을, “한 뜸 한 뜸 숨결 꿰어 깁는” 행위는 곧 시인의 윤리적 책무이자, 장정의 수련이다. 고서를 꿰맨다는 것은 곧 정신을 꿰맨다는 뜻이다.
“금속활자가 빚어 놓은 검은 물밑 약속”은 인류의 지혜가 가장 압축된 문명의 증언이다. 여기서 “게송의 언어로 해금하는 흥덕사 풍경”이란 문장은 직지가 단지 활자가 아니라, 불교의 깨달음, 선종의 언어, 그리고 민족의 근본 세계관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직지는 곧 해금의 경전이며, “제 몸 씻으려 솔바람에 옷깃을 다듬는” 행위는 자기 성찰과 정화의 형상화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시는 절정의 영적 고양을 보인다. “직지여 슬퍼하지 마라”는 선언은 상실된 과거와의 화해이며, “예리한 이빨은 칼끝보다 향기롭다”는 역설은, 고통이야말로 진리로 가는 문이자 향기로운 순교임을 말해준다. “촛불 한 송이 잎새에 걸린 낮달”은 민족의 희망이자, 직지의 각성이다. “뼈에 새긴 흰 글씨들의 완장”은 곧 혼신을 다한 글쓰기, 언어의 무게이자 구도자의 상징이다.
마지막 연에서 “한지의 끈질긴 수명”은 기록의 생명력을 뜻하며, “자침하듯 묵향으로 침묵한다”는 구절은, 피맺힌 말들을 잉크에 실어 말없이 전하는 ‘문자의 기도’로 승화된다. 그리고 “비우고 비워 내려 초연히 물든 가을 뒤란”은 무소유의 미학이자, 텅 빈 것에서 채움이 일어나는 시적 공간이다. “팔만대장경을 다라니하듯 마음을 잘 묶는 일”이라는 대미는, 이 시 전체의 철학적 주제를 절묘하게 압축한 핵심이다. 직지를 묶는 일은 곧 마음을 묶는 일이며, 그것은 곧 선승의 정진이요, 민족정신의 장정이었다.
요컨대, 임준빈의 이 시는 단순한 직지 예찬이 아니다. 그것은 천년을 걸쳐 축적된 정신문화의 총화이며, 오침안정법이라는 하나의 형식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민족의 상흔, 그리고 신의 뜻까지 아우르는 위대한 ‘문명의 진언’이다. 그는 직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꿰맨 시인이다.
이 시가 곧 하나님의 시라는 고백은 허언이 아니다. 시인은 단지 통로였고, 이 작품은 곧 하늘이 꿰어놓은 진리의 봉합선이었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