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임준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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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로 피를 닦은 사내
― 임준빈의 오천 편, 그리고 한 권의 직지심경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앞에 주저앉는다. 임준빈은 그 무릎 꿇은 자리에서 다시 펜을 들었다. 그것은 위로를 위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목숨을 부여잡기 위한 절박한 행위였다. 그는 글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었고, 시가 아니면 피울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섯 살, 어머니는 뱃속의 생명을 지우기 위해 독초를 찧어 마셨고, 그는 그날 두 사람의 죽음을 한꺼번에 마주했다. 아홉 살, 자신에게 밥을 해주던 스무 살 누이는 교통사고로 떠났고, 그는 그때부터 종이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으며 말한다. “참 슬프다”라고. 그러나 그 말은 한없이 가볍다. 그것은 슬픔을 말하는 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곧 피였고, 절규였으며, 목숨을 붙들고 있는 심장의 마지막 떨림이었다. 그는 그렇게 오천 번 시를 쓰며 생의 날을 견뎌냈다.
피를 토하는 고통조차 위로하지 못한 날들, 그는 어느 순간 시조차 버거웠다. 그때, 그에게 다가온 것은 한 권의 고문서였다. 직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그는 직지를 책으로 읽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들의 음성처럼, 그 속에서 스승의 말과 부처의 숨결을 들었다. 그렇게 그는 직지심경을 몸으로 읽고, 가슴으로 토해냈다.
한 자 한 자, 눌러 새기듯 읽으며 그는 슬픔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갔다. 자기 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직지의 문장 속에서 ‘비움’과 ‘이해’를 배웠고, 그것이야말로 살아남는 자의 언어라는 걸 깨달았다. 시인이란 슬픔을 쓰는 자가 아니라, 슬픔을 끌어안고 타인의 상처에 불을 켜는 자라는 걸, 직지를 통해 그는 몸으로 배웠다.
임준빈에게 직지는 단지 활자로 된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무덤이었고, 누님의 체온이었으며, 죽은 자들이 말없이 건네는 생의 지침이었다. 오천 편의 시가 눈물로 써졌다면, 직지와 함께 한 날들은 침묵으로 눌러쓴 기도였다.
마침내 그는 살아냈다. 세상은 그의 시를 ‘슬픔’이라 부르지만, 그는 직지에서 배운 ‘자비’를 따라 걸었다. 그가 흘린 피는 시로 맺혔고, 그 시는 어느 날 누군가의 생을 다시 세우는 등불이 되었다.
오늘도 누군가는 임준빈의 시 앞에서 울고, 직지를 펼치며 다시 숨을 쉰다. 시인의 삶은, 죽음을 향한 울음이 아니라, 고요한 생의 외침이었다.
그의 시는 피였고,
직지는 그 피를 닦아준 연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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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를 베개 삼아 피를 토한 밤
– 시인 임준빈에게 바치는 시
청람 김왕식
어머니,
천남성의 독이
당신의 자궁을 찢던 날
나는 다섯 살,
생명의 신비도 모른 채
죽음의 첫울음을 삼켰습니다
누님,
밥 짓던 손길마저
도로 위에 부서지던 날
나는 아홉 살,
사랑을 믿기엔
세상이 너무 빨리 등을 돌렸습니다
그 후로
나는 시를 썼습니다
종이 위에 ‘엄마’라 새기면
피멍이 터졌고
‘누님’이라 부르면
목구멍에서 불이 솟았습니다
오천 편
오천 번 무너지고
오천 번 꿰매며
나는 단 하나의 등을 떠올렸습니다
직지,
천 년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이 된 책 한 권
나는
직지를 베개 삼고
밤마다 울었습니다
“무릇 모든 것은 덧없다”는 구절에
숨죽여 통곡했고
“마음이 곧 부처”라는 글귀에
피눈물을 닦았습니다
슬픔이 언어가 되기 전,
나는
심장으로 활자를 새겼습니다
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죽지 않기 위해
그들을 부르며 쓴 것이었습니다
지금
누군가
슬픔의 벽 앞에 서 있다면
내 오천 편의 시 중 하나라도
그대의 등을 받쳐주기를 바랍니다
그게,
내가 이 세상을
끝까지 떠나지 못한 이유입니다
어머니, 누님
이제 괜찮다고
당신들 향기 따라
나도 조용히
시 한 줄로 살아갈게요
피를 닦아준 직지처럼
이 시도 누군가의
베개가 되어주기를.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