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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이 머무는 자리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차향이 머무는 자리




청람




한여름의 더위가 천지를 휘감던 날, 햇살은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쏟아졌고, 들길은 열기를 품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싹 마른 풀잎은 바람 한 줄기에 바스락대며 생명의 갈증을 토로했다. 계절의 한복판, 뜨거움의 정점에서 길은 문득 숲 속을 향해 굽어 들었고, 한적한 암자를 향한 발걸음이 조심스레 이어졌다.

아득한 산비탈을 올라, 인적 드문 숲길을 따라가면 세상의 소음은 하나둘 허공에 흩어지고, 고요가 초록의 틈 사이로 스며든다. 산허리에 깃든 작은 암자. 담장도, 화려한 단청도 없이 스스로를 낮춘 그곳은 오히려 존재의 깊이를 말없이 드러냈다. 돌담 너머 봉숭아 몇 송이 붉게 피어 있었고, 대숲 사이로 미풍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걸음을 옮길수록 온몸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고요가 마음 안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작은 평상 하나, 그늘 아래 놓여 있었다. 평상 위에는 찻잔과 다관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고, 차향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감쌌다.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언어는 스스로의 그림자를 걷었고, 감각은 깨어나 주변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바람은 이마를 쓸고 지나가고, 햇살은 나뭇잎을 투과하여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찻물은 맑고 투명하여, 그 안에 들판의 열기와 숲의 침묵이 동시에 담겨 있는 듯했다.

“더운 날 오셨습니다.” 스님의 목소리는 찻물보다 먼저 고요를 가르며 스며들었다. 찻잔에 입을 대는 순간, 온기와 향이 혀끝에 머물다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것은 단지 차가 아니었다. 바람소리, 산새의 울음, 시간의 부드러운 손끝까지도 그 한 모금에 실려 있었다. 스님은 물었다. “이 차는 어떤가요?” 한참 머문 뒤에야 대답이 떠올랐다.
“텅 비어 있는데, 향은 가득합니다.”
스님은 조용히 웃었다. “그것이 도(道)의 향이지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외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해주었고, 구름의 흐름 하나에도 마음은 덜어지고 맑아졌다. 미풍은 찻잔 둘레를 천천히 돌고, 햇살은 그늘 아래 가만히 머물렀다. 응어리진 기억도, 번잡한 생각도 그 자리에 이르면 그저 차분히 가라앉는다. 말은 물처럼 흐르고, 고요는 산처럼 버텼다.

스님은 한동안 먼 곳을 응시한다.

“한 잔의 차가 한 생을 비춥니다. 다만 우리는 그 찻잔을 들 여백을 몰랐을 뿐이지요.”

시간은 흐르되 머물고, 찻잔 속 마지막 잎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단지 찻잎이 아니었다. 응축된 하루, 눅진한 삶의 피로, 그 모든 것이 그 물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덥고 빠르게 돌아가겠지만, 그날의 차향은 서늘한 바람처럼 지금도 마음속을 거닐고 있다.

여름의 복판에도 고요한 자리는 있다. 그 자리는 밖에 있는 곳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본 마음 안쪽의 빈 평상 하나다.

그 위에 올려진 한 잔의 차, 그 향기로운 고요가 삶을 조용히 맑혀주는 것이다. 마치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 차는 말없이 생을 데운다.




차향 머무는 자리




여름 한복판
숨결마저 덥혀진 길
풀잎 아래 숨어 있던
작은 암자 하나 피어난다

평상 위 미풍 한 자락
찻잔은 고요를 담고
향기, 말보다 앞서
그늘 깊숙이 스민다

바람은 차를 흔들지 않고
햇살은 마음을 데우지 않으며
구름은 생각을 덜어낸다

떨어진 찻잎 하나
세상의 무게를 안고 가라앉고
그 위로는 고요가 앉는다

침묵은 언어보다 깊고
향은 시간보다 오래 남아
말을 비워낸 자리마다
부처의 그림자 피어난다

찻물은 흐르되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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