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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흐르는 밤, 멍석 위의 여름

김왕식









별이 흐르는 밤, 멍석 위의 여름



청람 김왕식





한여름 저녁, 바람 한 점 드물던 대지 위에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대낮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 시골 골목은 아지랑이 대신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데워진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오래된 멍석이 펼쳐지고, 그 위에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는다. 아이들은 앞마당을 달리고, 어른들은 손에 옥수수와 감자 한 자락씩 쥐고 있다.
그 삶은 조용하고 느리지만, 여름의 한 페이지처럼 진하고 향기롭다.

솥뚜껑을 여는 순간, 증기 사이로 퍼지는 감자의 내음은 한 세대의 기억을 깨운다. 서툰 손길로 껍질을 벗긴 옥수수는 알알이 웃음을 품고, 입안에선 촉촉하고 담백한 시간들이 씹혀 내려간다. 불을 지핀 재 위에 쪄낸 감자와 옥수수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더위를 이겨내는 방식이자, 사람과 사람이 엮이는 조용한 연대의 언어다.

하늘엔 여름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그 아래 누운 사람들은 별을 세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윤동주도 이런 밤에 별을 셌겠지” 하고 중얼이고, 누군가는 “저 별은 수박 별이다”라며 웃는다. 바람은 고요했고, 숨결은 정직했다. 달빛 아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어린아이는 엄마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잠들었다.

밤이 깊을수록 멍석 위의 시간은 더 맑아졌다. 말이 줄어들수록 마음은 더 가까워졌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그 감정—평화, 그것이 그 자리에 있었다.
눈을 감으면 옥수수 알갱이 하나하나가 별처럼 떠오르고, 감자의 단맛은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처럼 입가에 머물렀다. 기계 소음 없는 세계, 불빛 대신 별빛에 의지하던 시절의 고요가 되살아났다.

노인은 조용히 한숨을 쉬고, 젊은이는 막 돋은 별을 가리킨다. 말보다 표정이 많고, 소리보다 침묵이 깊은 그 여름의 밤. 아무도 빨리 걷지 않고,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멍석 위의 그 느림과 다정함 속에 몸을 누이고 마음을 풀어놓을 뿐이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이마 위로, 별빛 하나 떨어진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멍석 위의 온도만은 변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이내 중얼인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그 말은 달빛보다 부드럽고, 찐 감자보다 따뜻하다.

밤이 흐르고, 바람이 잦아들면 하나둘 자리를 턴다. 그러나 멍석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낮의 열기와 밤의 숨결,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이의 꿈까지 흠뻑 적셔진 멍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다.

별을 베개 삼아 자는 밤. 그 밤은 어느 시골 동네에 있었고, 누구의 기억에도 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누군가의 마음에 멍석처럼 깔릴 것이다.
옥수수와 감자의 향기, 구름 따라 흐른 별, 엄마의 무릎과 아이의 숨소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별처럼 반짝이는 밤이었다.
말 없는 사랑, 꾸밈없는 삶, 그리고 흐르되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고요였다.




멍석 위의 여름





한여름 저녁 느티나무 아래
멍석이 먼저 누웠다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감자 삶고 옥수수 까며
저녁바람 속 웃음 피웠다

솥뚜껑 열리면 김이 춤추고
감자 냄새가 저녁 하늘을 데웠다
손끝에서 껍질 벗기듯
삶의 피로도 하나씩 벗겨졌다

구름은 느리게 흘러가고
달빛은 멍석을 은빛으로 덮고
누군가 윤동주를 떠올리며
별을 세기 시작했다

아이 하나 엄마 무릎 베고
새근새근 꿈을 짓는다
별 하나, 숨결 하나,
감자 알맹이 하나,
모두 조용히 밤을 끓이고 있었다

말보다 다정한 침묵
빛보다 따뜻한 숨결
그 밤, 멍석은 시가 되었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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