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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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감성의 조화
청람 김왕식
깊은 밤, 책장을 넘기며 문득 생각에 잠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고하는 존재, 호모 사피엔스라 이름 붙인 스스로의 정체성은 지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왔다.
살아보니, 인간은 결코 이성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날카로운 논리와 분석 뒤엔 늘 애틋한 감정이 흐르고, 아무리 고도의 지혜를 지닌 자라 할지라도 사랑, 외로움, 연민 앞에선 흔들리기 마련이다.
지성은 세상을 이해하는 눈을 주고, 감성은 그 세계를 품는 가슴을 만든다. 지성이 현실을 진단하고 길을 찾는 이정표라면, 감성은 그 길 위에 꽃을 심고 그림자를 감싸는 이불이다. 지성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감성은 존재를 이해한다. 그러기에 둘은 결코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다. 외려 서로를 보완하고 함께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온전해진다.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에서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탐구했고, 문호 괴테는 이성과 감성의 긴장 위에 위대한 예술혼을 피워냈다. 현대에 와선 과학이 세상을 해석하고 예술이 그것을 수용한다.
그 사이를 이은 다리는 언제나 '조화'였다. 날 선 지성만으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넘치는 감성만으로는 세상을 이끌 수 없다.
한 송이 꽃을 바라보는 두 시선이 있다. 한 사람은 그 꽃의 분류학적 명칭을 외우고, 광합성의 과정을 설명하며,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 종인지 말한다. 또 한 사람은 그 꽃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그리움과 설렘을 꽃잎에 담는다. 전자는 지성이고, 후자는 감성이다.
둘 모두가 없다면, 그 꽃은 단지 '물체'일뿐이다. 세계는 그렇게 지성과 감성의 시선이 겹쳐질 때 비로소 생기를 띠고, 인간의 삶은 거기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면, 언제나 이 두 축의 균형에 닿는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 감성이 배제된 지성은 차갑고, 지성이 없는 감성은 흐릿하다. 앎은 따뜻해야 하며, 느낌은 명징해야 한다.
지성과 감성의 조화는 결국 '깨어 있는 삶'을 말한다. 생각하고, 느끼며, 그 생각이 타인을 위한 방향으로 확장될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역사 속 모든 큰 변화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이성이 촉발하지만, 그 이면엔 억눌린 감정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예술가의 창작 역시, 감정의 언어를 지성으로 조율하여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이 조화는 일상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픔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아픔에 다가서려는 마음을 내는 것. 책 한 권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에서 나아가,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 되묻는 것.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설득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태도. 이런 작은 실천들이 쌓여 진정한 지성, 따뜻한 감성의 인간을 만든다.
이성은 나를 바르게 세우고, 감성은 타인을 품게 한다. 지성은 방향을 주고, 감성은 속도를 조절한다. 그러므로 삶이란, 그 두 개의 수레바퀴가 균형을 이루며 나아가는 여행이다.
지성만의 언어로는 삶을 설명할 수 없고, 감성만의 고백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둘이 조화될 때, 인간은 '이해하는 존재'를 넘어 '공감하는 존재'로 성숙한다.
바로 거기서, 문명은 진보하고, 인간은 시가 된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