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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의 여름, 커피의 방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 빛바랜 철제 의자




한 잔의 커피, 한 조각의 사색



청람 김왕식



인문학 강의 차 지방에 들렀다.
연일 이어지는 혹서酷暑 속에 도시의 숨결조차 더위에 휘청이고 있었다. 햇볕은 아스팔트를 두들기고, 바람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한낮. 짧은 여유를 찾아 낯선 골목의 작은 커피숍에 몸을 맡겼다. 간판 하나 눈에 띄지 않는, 마치 시간의 틈새에 숨어 있는 공간이었다. 외관은 소박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른 계절로 옮겨온 듯한 묘한 기류가 흘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빛바랜 철제 의자였다.
어디서 보았을 법한 유럽풍의 곡선, 다소 낡았으나 품격을 잃지 않은 자태. 묵은 세월이 고요하게 스며들어 있었고, 앉는 순간 묘하게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단정함이 있었다. 모던함을 강요하지 않고, 옛것의 미감을 그대로 간직한 그 의자는 공간의 기품이었고, 커피보다 더 깊은 향이었다.

실내는 정갈했다. 인테리어의 화려함보다 균형과 절제가 먼저였다.
은은하게 퍼지는 원두의 향, 그 위로 쇼팽의 녹턴이 흘렀다. 계절은 분명 여름이지만, 음악과 향기, 조용한 조명 아래 앉아 있자니 계절마저 물러서고 정신이 먼저 깊어졌다. 익숙함이 없는 공간인데도 마음은 편안했다. 외부의 뜨거움은 창밖으로 밀어내고, 내부의 차분함은 내면의 호흡을 고르게 했다. 여기서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을 깨우는 언어였고, 사유를 담는 잔이었다.

문득 옆 테이블에 앉은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흐트러짐 없고, 단정한 셔츠 위에 얹힌 미소는 마치 오랜 시간 다듬어진 문장 같았다. 말없이 앉아 커피를 들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넘기고 있었다. 삶을 충분히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기품. 눈빛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지혜가 깃들어 있었고, 그의 침묵은 이 공간 전체에 고요한 존엄을 더해주었다. 그가 흘려보낸 미소 하나에도 시간이 맑게 담겨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앉았던 철제 의자는 그가 남긴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래된 시를 한 편 읽은 것처럼, 그를 배웅하듯 눈길을 보내며 조용히 다시 커피를 들었다. 어느새 내 안의 무언가도 정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을, 그와 같은 시간과 마주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결국 머무는 곳에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길 위의 강의도 소중하지만, 가끔은 그 길에서 만나는 작은 공간이 나를 다시 길 위에 세운다. 커피 한 잔, 고풍스런 의자 하나, 그리고 잔잔한 음악과 한 노신사의 품격. 그것이 내게는 오늘의 인문학이었다. 철학서보다, 강의보다 더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킨 한 장면.
사람은 문장이 되고, 공간은 철학이 되며, 침묵은 음악이 되었다.

이 여름, 혹서의 강을 건너며 나는 또 하나의 기억을 절여 넣는다.
고요한 그 커피숍의 냄새와, 쇼팽의 멜로디, 그리고 백발 신사의 미소.
그것은 더위 속에서도 식지 않는, 사색의 향기였다.




고풍의 여름, 커피의 방



청람 김왕식


혹서酷暑의 계절,

지방 어느 골목 끝

작은 커피숍 하나

문득 시간의 틈처럼 열렸다


빛바랜 철제 의자

세월의 곡선이 등받이 되어

말없이 고요를 권한다

단정한 침묵이 앉아 있는 자리


은은한 커피 향 스미고

쇼팽의 녹턴 흐르는 공간

더위의 외곽,

사유의 중심이었다


창가에 머문 노신사

백발에 맺힌 단정한 미소

절제된 손끝은 계절을 넘기고

한 모금의 고요로 품격을 말한다


말 없는 시간이

잔 위에 맺힌다

가장 단아한 언어는

묵음 속에 태어난다


사람은 문장이 되고

의자는 시가 된다

하루의 뜨거움 속에서

오래 남는 건

잠깐의 고요, 한 잔의 깊이


여름은 바깥에 있고

철학은 이 작은 방에 있다

커피 향 깊어질수록

존재는 더욱 투명해진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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