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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초 시인의 「쓸쓸함 한 잔」 ㅡ 청람 김왕식

김왕식


□ 인혜초 시인





□ 하남 검단역 전철역 문

ㅡ 안혜초 시인의 '쓸쓸함 한 잔'





쓸쓸함 한 잔




시인 안혜초





쓸쓸함 한 잔
드실까요

초가을 맑으나 맑은
말씀으로
고여서 오는

초가을 높으나 높은
하늘빛깔의
머언
그리움

한 숟갈 넣어서







쓸쓸함이라는 영성의 시학

― 안혜초 시인의 「쓸쓸함 한 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안혜초 시인의 시 「쓸쓸함 한 잔」은 인간 내면의 가장 섬세한 결을 찻잔에 우려내듯 표현한 단정하고도 깊은 서정시이다. 시인은 ‘쓸쓸함’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외려 그 감정을 한 잔의 음료로 초대하며, 그 안에 계절과 말씀과 그리움을 천천히 섞는다. 이는 시인이 평소 지향하는 ‘정복(靜福)’의 철학, 즉 정적인 평안 속에서 존재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첫 행 “쓸쓸함 한 잔 드실까요”는 단순한 권유를 넘어선 영혼의 속삭임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명상과 사색의 초대이며, 삶의 격렬함과 단절된 곳에서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깊은 응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적 사유의 중심에 놓인 것은 초가을의 맑음이다. 그것은 계절의 한 단면을 넘어서서, 시인의 내면 풍경을 대변한다. ‘맑으나 맑은 말씀’은 단어 자체가 복음적이며, 언어의 원형성과 영성의 투명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기독교문학상을 비롯한 종교적 문학에 깊이 관여해 온 생애와 시학을 반영하는 상징이다.

“머언 그리움 한 숟갈 넣어서”라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 추억이나 상실이 아니라, 더 고요하고 본질적인 ‘그리움’을 삶의 음미로 제안한다. 이는 시인의 미의식이 감각적 표현보다도 정신적 깊이, 신앙적 고요 속의 예술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인은 ‘그리움’을 미분화된 고독이나 흔한 감상에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자아와 초월, 인간과 절대자의 사이에 놓인 존재론적 거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시의 그리움은 정서가 아니라 신학이며, 감각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내면 성찰이다.

안혜초 시인은 문단에서 윤동주문학상, 영랑문학상 등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시집 『귤ㆍ레먼ㆍ탱자』에서 보여준 직관과 이미지의 실험성은, 『달 속의 뼈』를 지나며 더욱 정제된 언어성과 철학성으로 전이된다.

특히 『詩 쓰는 일』에서는 시인 자신의 사명성과 존재론적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의 시 세계는 언제나 ‘조용한 은혜’와 ‘내면적 정직함’의 길을 따른다.

그는 “너무 바쁘지도 않고, 너무 한가롭지도 않은”, 한두 잔의 쓸쓸함 속에서 명상과 영성을 맛보는 시인이었다. 이는 현대문명 속에서 감정이 소모되는 속도를 거스르며, 존재의 뿌리를 다시 깊이 내리려는 고집스러운 시인의 길이다. 오늘의 한국시가 때론 과잉 감각과 이념적 대립에 흔들리는 가운데, 안혜초 시인의 시학은 마치 고요한 우물처럼, 인간 본성의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언어의 물결을 보여준다.

요컨대, 「쓸쓸함 한 잔」은 단순한 정서의 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존재, 신과 관계, 계절과 감정이 어우러지는 시적 미학의 결정체이다. 안혜초 시인은 ‘쓸쓸함’을 기피하거나 극복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쓸쓸함의 정적이고 순결한 기운 속에서 삶의 본질과 시의 진실을 길어 올리는 고요한 영성의 시인으로 우뚝 서 있다. 그 조용한 잔 하나가 독자의 마음에도 맑게 고여, 오늘 하루의 삶을 더욱 깊고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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