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의 피맛골 사람들 ㅡ 제8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제8편




청람의 피맛골 사람들




제8편
〈간판을 지킨 사람〉
― "불빛보다 오래된 기억은 간판에 남는다"






피맛골 북쪽 고샅 끝,
황토색 벽지 위에
지워질 듯 말 듯 걸린 ‘피맛전파사’.
네온 하나 없이,
필기체로 그려진 한글 간판.
한자도 영어도 없다.

그 간판 밑엔
하동팔(66)이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간판을 올려다보며
먼지를 닦고
나사 한 번씩 조인다.

“이 간판은
우리 아버지가 손으로 써 붙인 거여.
먹을 건 못 물려줘도,
이 이름 하나는 지키라 하셨어.”

동팔의 말투는
사투리와 고유어가 뒤엉킨
골목 말의 결정체였다.

“이건 뭐랄까…
불빛은 없어도
가슴에 불은 남겨주는 글씨랄까.”


며칠 전부터
수상한 양복쟁이 둘이
전파사 앞을 맴돌았다.

“선생님, 이 자리에
카페 겸 전시관 만들 생각입니다.
간판만 떼어내면, 전면 유리로 바꾸고…”

“그 간판 떼면,
내 가슴도 떼는 거랑 같어.”

“이제 그런 간판 시대 아니잖아요.
LED 간판, 시인성 좋고… 감성 마케팅에도…”

동팔은 피식 웃었다.

“여보슈,
시인성은 있어도
시정은 없는 간판이잖어.”

그는 빛바랜 간판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외려
세상이 자꾸 눈부셔져서
그 아래로 숨어들어야
제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폭우와 함께
피맛골 전체가 정전되었다.
가게마다 불이 꺼졌고,
사람들은 손전등을 들고
골목을 더듬었다.

그때,
전파사 간판 위에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건전지 하나에 연결된
작은 백열전구 하나.
그 불빛은
지금도 수동 튜닝으로 연결된
진공관 라디오 전원에서 왔다.

“이건,
사람이 손으로 살린 불빛이여.”

사람들은 말없이
간판 아래 모여 섰다.

그 불빛 아래선
누구도 위아래 따지지 않았고
젊은이도, 노인도
다 같은 눈을 가졌다.

“동팔이 형,
왜 그렇게 이걸 지켰어?”
삼해주방 난복이 물었다.

“살아보니,
사람은 집보다
이름 하나가 무너지면
무너지더라.”

“그 이름이 어디 붙냐고 묻는다면,
난 간판이라고 답하겄어.
간판은 얼굴 앞에 붙은
제일 오래가는 명함이잖여.”

다음 날,
재개발 투자 회사는
계약을 철회했다.

전파사의 간판은
문화재는 아니었지만,
그 골목 사람들에겐
마음의 표지석이었다.


{“간판은 글씨가 아니라
그곳을 지킨 사람의 표정이다.
피맛골의 표정은
지금도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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