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옥 시인의 「가우라꽃」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 정근옥 시인











가우라꽃




시인 정근옥




가을가랑잎처럼 바짝 말라붙은
가슴이 타올라
흰 연기를 범종소리와 함께
머언 바다로 날려 보내 버린다

저녁놀 속에 타오르는
저 미친 그리움
분홍나비가 되어
산사 가는 길가에 가득 피어나
흔들흔들 민살풀이춤을 추는구나

이승의 사랑 이루지 못한 이의
숨겨둔 맘 숯불로 타오르면
은빛 불꽃 하늘로 솟아올라
밤마다 별이 되어 깜박거린다



정근옥 시인

문학비평가,
문학박사,
국제펜한국본부 감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자문위원(부이사장), 중앙대인회부화장,
한국문협회원,
서울교원문학회장,
상계고 교장 역임
‘시와 함께’ 주간,
대한교육신문논설위원,
중앙대 교직동문회장,
시집 : ‘수도원 밖의 새들’, ‘인연송’, ‘어머니의 강’ 외,
평론집 ; ‘조지훈 시연구’ 외,
에세이집: ‘행복의 솔밭에서 별을 가꾸다’




정근옥 시인의 '가우라꽃'
― 삶을 품은 교사의 시심, 이승과 저승을 잇는 그리움의 무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근옥 시인은 한평생 교육의 길을 걸으며, 지식 이전에 사랑을 가르쳐 온 가슴의 교육자이다.
그의 가르침은 칠판 앞에서 멈추지 않았고, 학생들의 눈빛을 길잡이 삼아 그들의 마음까지 품어내려 한 따스한 노정이었다.
자연 역시 그에게는 교육의 연장이었다. 꽃 한 송이, 잎새 하나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았고,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에서도 사람의 운명을 읽어냈다. 시인은 그렇게,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사이를 문학의 다리로 이어놓는다.
시「가우라꽃」은 그 문턱 위에서 피어난 한 송이 그리움의 꽃이다.

시의 첫 연은 고통과 회한으로 말라붙은 가슴이 흰 연기로 피어오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가을가랑잎처럼 바짝 말라붙은 / 가슴이 타올라”라는 구절은 단순한 계절감 이상의 내면의 건조함, 메마른 그리움, 혹은 상실의 깊이를 상징한다. 여기서 ‘가슴이 타올라’라는 표현은 감정의 분출이 아닌, 숯불처럼 오래 눌러왔던 감정의 응축이 임계점을 넘어 터져 나오는 순간을 함축한다.
그 감정은 결국 “범종소리와 함께 머언 바다로 날려 보내”진다. 여기서 범종소리는 불교적 상징으로, 인간의 번뇌를 씻어내는 울림이자, 사바세계의 경계를 넘는 정화의 메시지다. 즉, 고통은 정화되고, 그리움은 떠나보내짐으로써 마침내 해탈의 길로 들어선다.

둘째 연에서 그리움은 다시 “저녁놀 속에 타오르는 / 저 미친 그리움”으로 형상화된다. 이 그리움은 광기 어린 고통이라기보다는, 생을 던져도 아깝지 않을 뜨거운 진심이며,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이 분홍나비가 되어 피어난다.
‘산사 가는 길가에 가득 피어나 / 흔들흔들 민살풀이춤을 추는’ 이 나비들은 단지 자연의 풍경이 아니다. 그들은 허공의 애틋함, 생과 죽음의 통로에서 부유하는 영혼이며, 한을 품은 자의 슬픈 환생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연을 ‘그림’으로 삼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영혼을 불러내어 춤추게 한다.

마지막 연은 이러한 그리움이 어떻게 우주로 승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승의 사랑 이루지 못한 이의 / 숨겨둔 맘 숯불로 타오르면’—여기서 ‘숯불’은 애정의 집착이 아니라, 정갈하고 묵직한 진심이다. 그 마음은 ‘은빛 불꽃 하늘로 솟아올라 / 밤마다 별이 되어 깜박거린다.’
결국 인간의 감정은 허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맞닿아 다시 빛으로 환원된다. 삶의 고통이 별빛으로 환생하는 순간, 시인은 ‘죽음 이후’까지 품어낸다.

정근옥 시인의 시는 일상에 닿아 있으나, 그 시선은 언제나 내면의 숭고함을 향한다. 그는 교육자이자 시인으로서, 꽃 한 송이의 진실함 속에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담아낸다. 시에서 나타나는 가우라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남기려는 교육자의 삶이자, 다하지 못한 사랑을 품은 인간의 초상을 대변한다.

이처럼 '가우라꽃'은 삶과 죽음, 그리움과 해탈,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시로 가만히 넘나들며, 자연이라는 조용한 거울 속에 인간의 마음을 비춰준다. 정근옥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시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결국 그는 교육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닌, 사라진 이들까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단지 ‘아름답다’는 찬사를 넘어, ‘경건하다’는 고백으로 마주해야 한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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