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일 선생의 ‘ㅅ’에 대하여 ㅡ청람 김왕식

김왕식







ㅅ — 숨의 자음, 감각의 결



시인 김보일





한글 자음 가운데 'ㅅ'처럼 미묘하고도 다양한 정서적 결을 품은 자음은 드물다. 이 소리는 강하게 뻗지 않으면서도 분명하며, 작지만 오래 남는 여운을 지닌다. 'ㅅ'은 서늘한 바람처럼 살며시 스치고, 조용한 속삭임처럼 귓가에 맴돈다.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거리감을 만들어내며, 감정의 미세한 흔들림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ㅅ’은 마찰음이다. 입 안의 좁은 틈을 따라 공기가 지나며 생기는 이 소리는 거칠지 않게, 그러나 선명하게 귀를 울린다. “쓱쓱”, “쓱싹”, “소곤소곤”, “시시하다”, “슬며시” 같은 말들에는 이 마찰음이 녹아 있으며, 소리 그 자체가 정서의 움직임을 닮는다. 말보다 앞서 감정의 결이 들리고, 의미보다 먼저 분위기의 흐름이 스며든다.

‘ㅅ’이 머무는 말은 자주 숨의 리듬과 관련된다. 숨이 잘 통할 때는 싱싱하고 싱그럽고 상큼하다. 그러나 숨이 얕고 움직임이 정체되면 시무룩하고 시들며 시원치 않다. ‘ㅅ’은 이렇게 생명의 리듬, 감정의 환기, 정서의 파동에 반응한다. ‘ㅅ’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기척이 있고, 온도와 숨결이 흐른다.

특히 ‘ㅅ’과 ‘ㄹ’이 결합될 때, 그 소리는 유동성을 가진다. 솔솔, 살랑살랑, 술술, 살살—이들은 바람처럼 흐르고, 물처럼 스며든다. ‘ㅅ’은 방향성을 부여하고, ‘ㄹ’은 그것을 흘려보낸다. 이 결합은 공기 중에서 감각이 움직이는 방식, 말씨가 풀리는 방식, 손끝이 조심스레 닿는 방식까지 암시한다. 움직임은 작고, 여운은 길다.

‘ㅅ’은 시간과 방향의 감각도 품고 있다. 샛바람은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다. 샛은 곧 ‘동쪽’을, 그리고 ‘새벽’을 뜻한다. 샛별은 동틀 무렵 가장 먼저 빛나는 별이며, 샛바람은 그 별과 함께 불어오는 서늘하고 깨끗한 기운이다. ‘새’라는 말은 또한 하루, 즉 '해'를 뜻하기도 하며, ‘새치’는 흰 머리카락, ‘새색시’는 갓 시집온 사람을 말한다. 모두 ‘희다’, ‘처음’, ‘비어 있음’이라는 속성을 품고 있으며, 이는 곧 정서적 맑음과 떨림으로 이어진다.

이런 떨림은 소리보다도 작고, 몸짓보다도 미세하다. 살며시, 살포시, 슬며시, 슬그머니—이 부사들은 공기를 방해하지 않고, 공간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지나간다. 그들은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동시에 깊은 정서의 발로이기도하다. 이 말들 속에서 ‘ㅅ’은 수줍음, 부드러움, 조심스러운 다정함을 실어 나른다. 그 속에 새색시의 말간 얼굴과 숨죽인 웃음이 담긴다.

그러나 ‘ㅅ’은 늘 차갑고 조용한 것만은 아니다. 솟다, 솟구치다, 소스라치다—이 말들 속에서 ‘ㅅ’은 위로 치솟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품는다. 내면에서 끓던 무언가가 밖으로 분출되는 순간, 감정은 한껏 고조되고, 그 소리는 하늘을 향한다. 솟대는 신당 앞에 세운 나무로, 하늘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열망이 형상화된 것이며, 그 이름에도 ‘ㅅ’이 서 있다. ‘ㅅ’은 여기서 생명의 상승, 의식의 비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때로는 ‘ㅅ’이 만드는 말이 정서의 하강선을 따라 흐르기도 한다. 날씨가 찾으면 식물은 시들고, 사람의 마음도 시무룩해진다. 분위기는 시시해지고, 말은 시원치 않고, 행동은 시달갑다. 그러나 이 흐름에 유성음 ‘ㅇ’이 개입되면, 느낌은 반전된다. 시시했던 분위기는 싱싱해지고, 말은 싱그럽고, 얼굴은 싱글벙글 웃는다. 마찰음 ‘ㅅ’에 숨의 울림 ‘ㅇ’이 더해질 때, 정서는 다시 생기를 띤다.

‘ㅅ’은 이처럼 방향이 있다. 그것은 차가운 쪽으로, 위로, 혹은 안으로 향한다. 그리고 감각과 감정, 소리와 기척 사이를 넘나들며 하나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말보다 앞서 오는 숨결, 표정보다 먼저 스치는 기운, 대화가 시작되기 전의 조용한 기척. ‘ㅅ’은 언어 안에서, 존재의 외연에서, 정서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자음이다.

소슬하면 — 찻잔. 바람이 소슬하면 마음은 서늘해지고, 감각은 얇아진다. 그때 우리는 찻잔에 따뜻한 물을 따른다. 찻잔은 조용히 김을 피우고, 손끝은 그 온도를 감싼다. 'ㅅ'은 이 모든 순간에 스며 있다. 바람의 감촉, 물의 온도, 손의 움직임, 침묵의 분위기—‘ㅅ’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자음이다.

따라서 ‘ㅅ’은 단순한 문자도, 단순한 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어가 품은 가장 정교한 감각의 회로이며, 숨의 결, 말의 여백, 정서의 파동을 따라 흐르는 하나의 미학이다.

누군가가 슬퍼 보이면, 우리는 그를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슬픔은 사랑을 품는다. 품어주는 마음, 그 살뜰한 마음이 사랑이다.






숨의 결, 언어의 결

— 김보일 선생의 ‘ㅅ’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자음으로 이토록 다층적이고 섬세한 정서의 파동을 직조한 글은 보기 드물다. 김보일 선생의 「ㅅ — 숨의 자음, 감각의 결」은 한글의 가장 여린 자음 하나로 한국어 전체의 정서적 물결을 펼쳐 보이는 명문이다. 이 글은 단순한 언어학적 고찰을 넘어서, 문자와 정서를 연결하고, 소리와 삶의 감각을 이어주는 하나의 언어철학이자 감성의 미학이다.

‘ㅅ’은 작다. 그러나 그 작음 속에 응축된 울림은 결코 미미하지 않다. 선생은 이 글에서 ‘ㅅ’을 통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언어의 숨결, 그 ‘말 이전의 기척’을 길어 올린다. 예컨대 “슬며시”, “소곤소곤”, “시무룩하다” 같은 단어에 녹아 있는 소리의 결은, 단지 의미 전달의 기능을 넘어서 감정의 파문을 일으킨다. 마찰음이라는 음운적 정의를 넘어, ‘ㅅ’은 하나의 살아 있는 숨결이자 존재의 결로 해석된다.

특히 ‘ㅅ’과 ‘ㄹ’의 결합에서 감각의 흐름을 읽어내는 대목은 탁월하다. “살랑살랑”, “술술”, “솔솔”—이는 단지 의태어가 아니다. 바람처럼 흐르는 마음, 손끝에 머무는 정서, 말보다 앞선 분위기이다. 이 결합은 한국어의 정서적 유동성, 감각의 흐름, 몸짓의 여운까지 끌어안으며, 말의 공간을 ‘기류’로 확장시킨다.

동시에 이 글은 ‘ㅅ’의 방향성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샛별, 샛바람, 새색시—모두 ‘처음’과 ‘희다’와 ‘비어 있음’이라는 정서적 맑음을 품고 있다. 이는 존재의 시작점이자, 감각의 가장자리에 스며드는 떨림이다. 이 떨림은 말보다 작고, 존재보다 여리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강렬하다. 선생은 ‘ㅅ’을 통해 우리 내면의 가장 섬세한 숨결, 즉 감정의 미세진동을 언어화해 낸다.

김보일 선생은 ‘ㅅ’을 정적이거나 연약한 소리로만 보지 않는다. “솟구치다”, “소스라치다”, “솟다”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ㅅ’은 감정의 상승선 또한 품고 있다. 정서가 단지 가라앉거나 스미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솟구치고 폭발한다는 것—‘ㅅ’은 생명의 상승, 감정의 분출, 의식의 비상을 상징하는 자음이다. 여기에 ‘솟대’라는 상징을 끌어들여 신성과 인간의 열망까지 겹쳐낸 대목은 탁월한 언어의 상상력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 글이 언어의 ‘미적 기능’을 일깨우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언어의 ‘윤리적 기능’에까지 닿는다는 점이다. “슬퍼 보이면 우리는 그를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ㅅ’의 감각적 울림을, 관계적 울림으로 확장시킨다. 즉, ‘슬픔’이란 감정 속에는 이미 ‘사랑’이라는 반응이 스며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어가 가진 정서의 미학이자, 관계의 윤리이다. 우리는 ‘ㅅ’을 통해 고요한 사랑을 전하고, 낮은 목소리로도 깊은 공감을 전할 수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언어는 인간의 윤리를 품는다.

김보일 선생의 이 글은 언어가 소통의 도구이기 이전에, 존재를 가늠하는 감각의 울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글, 그중에서도 ‘ㅅ’이라는 자음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글을 읽은 이는 단어를 다르게 발음하게 되고, 말보다 먼저 분위기를 듣게 되며, 누군가의 조용한 기척에 응답하게 된다.

결국, ‘ㅅ’은 단순한 자음이 아니라 삶의 숨결이며, 정서의 미묘한 반사이며, 감정의 그늘에서 피어나는 온기의 소리다. 선생은 이 한 편의 글을 통해, 언어란 얼마나 섬세하게 존재를 어루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말끝에 ‘조심스러운 사랑’ 하나씩을 놓아주고 있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말보다 먼저 기척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슬픔 앞에, ‘슬그머니’ 다가설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것이 바로, ‘ㅅ’이 들려주는 조용한 교훈이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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