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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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관 너머, 한 줌의 심장을 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물관 한켠, 투명한 유리관 속에 누운 작은 토기 하나. 조명은 은은하고, 온도는 일정하며, 습도조차 제어된 공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제어되지 않는다. 바람의 결 따라 먼 길을 걸어온 흙 한 줌이, 고요한 숨결처럼 눕혀져 있다. 누군가는 ‘유물’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유산’이라 명명하지만, 그 작은 토기를 바라보는 순간, 그 안에서 뛰는 것은 다름 아닌 한 줌의 심장이었다.
토기는 말이 없다.
침묵보다 강한 언어로 말한다. 유리관 밖에서 바라보는 이의 눈빛이 조금만 깊어질 때, 토기는 천천히 속살을 열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불을 견뎌낸 결심과 손끝의 정성, 그리고 시간의 결이 겹겹이 스며 있다. 그 곡선은 아기의 뺨처럼 말갛고, 표면의 빗살무늬는 마치 어머니의 지문처럼 다정하다. 그것은 형태를 가진 기억이며, 마음을 빚은 그릇이다.
토기의 태초는 흙이다.
지금 이 유리관 속의 토기는 단순한 흙의 흔적이 아니다. 달빛 아래 어머니의 손에서 태동했고, 수천 년을 견디며 삶의 무늬를 간직한, 하나의 생명이다. 그 속에 잠든 것은 도구가 아니라 전언이며, 유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이다. 이 땅을 딛고 살았던 이름 모를 사람의 체온과 눈물, 사랑과 노동이 마치 심장처럼 고요히 뛴다.
가끔은 유리관 속에서 토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대지의 낮은 심장 박동처럼 조근한 소리가 밀려온다. 그건 어머니의 숨결이고, 딸의 딸들이 전해준 맥박이며, 공동체의 기억이다. 그것은 박제된 박물관의 전시물이 아니라, 사람과 시간을 연결하는 매개이자, 사라진 세월의 복원이다.
토기의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럽다. 그것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은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유리관 속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생명을 품고 있다. 손끝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 그것이 이 작은 토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깊은 진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문명을 건축물이나 문자, 화폐로 기억하려 한다.
진짜 문명은, 그 작은 그릇 하나 속에 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밥을 담았고, 누군가의 가슴에 안겨 삶을 품었던 토기. 그 안엔 삶의 사소한 진실들이 고요히 눕는다. 누구의 밥상이었을까, 누구의 손에 놓였을까. 그런 질문들이 마음을 물들인다.
이제는 손댈 수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본다. 손끝으로 어루만질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만져지는 거리. 토기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은 흙이 아니라 마음을 빚은 그릇이라는 것을.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놓인 지금, 토기는 말한다. 나는 처음부터 그대였다, 여전히 그대 안에 살아 있다고.
유리관 속에 있지만 결코 닫히지 않은 토기. 그것은 기억을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열어놓는다. 우리가 잊고 있던 본질을, 흙처럼 낮은 삶의 온도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던 오래된 숨결을. 지금도 그 숨결은 유리관 너머에서 조용히 우리를 부른다. 토기 하나가, 세월을 껴안은 채 다시 살아난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의 첫울음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