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기 화백의 침묵의 미학을 따라 ㅡ청람 김왕식

김왕식



□ 손정기 화백




그림자와 걷는 사내
― 손정기 화백의 침묵의 미학을 따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세상에는 말하지 않고도 이야기하는 자가 있다.
그는 문장을 쓰지 않지만, 하나의 선(線)으로 생을 쓴다.
색을 입히지 않아도 감정을 물들이고, 침묵으로도 울림을 남긴다.
손정기 화백.
그는 붓을 든 시인이며,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인간을 응시하는 작가다.

35도를 웃도는 한여름, 평창동 둔덕 위 ‘갤러리 세줄’을 찾았다.
세 줄의 언어, 세 겹의 의미, 세 겹의 여운을 안고 그림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림 앞에 서자, 나는 말을 잃었다. 아니, 말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작품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 서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림 속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의 눈동자도, 그의 표정도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는 나를 본다.

그림 속 남자는 늘 혼자다.
어깨는 말이 없고, 발끝은 고요하다.
그가 가는 길에는 이정표도, 목적지도 없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아니, 무엇으로부터 떠나는가?

그 길 위의 사내는 아마도 손정기 화백 자신일 것이다.
말을 걸어오지 않고도,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쯤 있느냐’고.
나는 답하지 못한다.
대신, 그 그림 속의 사내처럼 걸음을 내디딘다.
서너 발짝 뒤에서, 조심스레 따라간다.
그의 고독은 나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 고독은 혼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기 위한 자발적 여백이다.

손정기 화백의 화면은 흑과 백 사이의 숨결로 이루어져 있다.
어디선가 바람이 걸어 나오는 듯한,
빛이 낮게 엎드린 듯한 그 여백 속에서
그림은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나로 하여금 질문하게 한다.

그림은 수면이다.
나는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그림자다.
그의 그림은 ‘reflection’이다.
단순한 반영이 아닌, 내면의 물음이 되돌아오는 울림.
그림은 거울이 아니라 우물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빠져든다.

그림 속의 자연은 배경이 아니다.
말없는 주체다.
강물은 침묵으로 흘러가고,
산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음으로 충분하다.
손정기의 자연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존재’들의 연합이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는 사내는
그 말없음에 동의하며 걷는 자다.

나는 그 사내와 손정기 화백이
손을 잡고 걷고 있음을 본다.
그 둘은 사실 하나이며,
그 길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내부를 향한 여정이다.

마침내, 나도 그 뒤를 따른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나도 나 자신과 함께 걷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전시는 그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철학이 흑과 백 사이에 새겨놓은
말 없는 시(詩)이며,
무언의 기도이고,
존재의 흔적이다.

그림이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손정기 화백은 떠났지만,
그림 속 사내는
지금도 나직이 발끝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서너 걸음 뒤에서
그와 함께 걷는다.




그림자, 그 너머


청람




말이 무릎을 꿇는 순간,
나는 그의 그림 앞에 선다

빛은 물러나고
색은 침묵하며
흑과 백 사이,
하나의 사내가 걷고 있다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본다
뒤돌아선 그의 뒷모습이
나의 얼굴을 비춘다

그림은 거울이 아니라 우물
내가 던진 물음이
고요히 나를 되돌려 안는다

자연은 증명하지 않는다
존재는 흐른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언어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서너 걸음,
존재와 존재 사이의 거리만큼

그의 고독은 닫힌 방이 아니라
내면으로 향한 문

그 문을 열고
나는 나를 마주한다

그는 화가가 아니었다
붓을 든 시인이었고
침묵 위에 말을 놓는 자였다

세상에 없는 문장을
가장 조용한 붓끝으로
지금도
그리고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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