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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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학교 한 학생이
《꽃들에게 희망을》을 읽고 있다.
90년에 구입해 읽은 적이 있어
잠깐 빌려 훑어봤다.
몇 줄
소략하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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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 기둥에서 고치로, 고치에서 하늘로
청람 김왕식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겉으로는 단순한 그림책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과 시대의 영성이 응축되어 있다. 애벌레의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동화적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사실상 성인을 위한 철학적 우화다. 1972년 출간 당시 미국 사회는 경쟁과 물질적 풍요 속에 방향을 잃어가던 시기였다. 이 책은 바로 그 공백을 메우며 개인의 변형, 사랑, 공동체적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애벌레 스트라이프와 옐로는 “높이 올라야만 의미가 있다”는 강박 속에서 기둥을 기어오른다. 그러나 정상에서 기다리는 것은 비어 있는 허무뿐이다. 옐로는 기둥을 떠나 고치의 길을 택한다. 죽음을 통과하듯 스스로를 비워내고, 마침내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난다. 반면 스트라이프는 기둥 꼭대기에서 허무를 경험한 뒤에야 옐로의 길이 참됨을 깨닫는다. 작품은 두 애벌레의 선택을 통해 삶의 방향을 묻는다. 경쟁과 서열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인가.
여기서 ‘기둥’은 성과와 서열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의 경쟁 구조를 상징한다. 그곳은 타인의 등을 밟아야만 위로 오를 수 있는 구조이며, 정상은 공허하다.
반면 ‘고치’는 내면 변형의 공간이다. 그것은 자기 포기의 미학이며, 한때의 자아를 버리고 더 큰 생명을 품는 과정이다. 옐로가 택한 길은 단순한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변모였다. 작품 속 현자 애벌레가 말하듯, 나비는 “땅과 하늘을 잇고 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존재”다. 이는 곧 개인의 변형이 공동체적 생태 순환으로 이어진다는 선언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제는 ‘사랑’이다. 옐로는 변형을 먼저 경험하고 나서, 스트라이프를 억지로 끌어내리지 않는다. 그는 기다린다. 사랑이란 상대를 도구화하지 않고, 스스로 눈뜨도록 지켜보는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두 존재가 다시 만나 함께 날아오르는 순간, 사랑은 변형의 결과물이자 조건임을 확인하게 된다.
작품은 미니멀한 문장과 여백, 단순한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간결함은 독자에게 사유의 공간을 남긴다. 어린아이에게는 단순한 이야기로, 어른에게는 경쟁과 변신의 우화로 읽히며, 교실·기업·신앙 공동체에서 거듭 활용되는 힘도 여기서 비롯된다.
물론 이 작품이 가진 한계도 있다. 기둥에서 내려와 고치를 감행하라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개인의 변형에 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조적 악이나 사회 제도의 문제는 간단히 개인의 각성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또한 ‘기둥=악, 고치=선’이라는 이분법은 다소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이 작품이 제시하는 가장 큰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경쟁의 신화에서 벗어나, 내면의 비움과 관계적 성숙으로 나아가라.”
오늘날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여전히 절실하다. 속도의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사다리가 아니라 올바른 변형이다. 개인과 조직은 일정 비율의 ‘고치 시간’을 확보해야 하며, 서로를 기다려주는 사랑의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나비가 꽃과 꽃을 잇듯, 각자의 날갯짓은 공동체와 생태를 살리는 순환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꽃들에게 희망을》은 말한다. 희망은 정상에 도달했을 때 얻는 것이 아니라, 고치 속에서 스스로를 버리고 다시 태어날 때 시작된다고. 그리고 그 희망이 서로의 날갯짓을 타고 꽃 사이를 옮겨 다닐 때, 비로소 세상은 피어난다고. 희망은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솟아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