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소꿉친구로서의 삶 ― 이기순 시의 세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아내

시인 낭산 이기순




세상살이 이야기
도란도란 속삭이고
빛바랜 사진 속의 추억
잃어버린 향수를
곱게 채워주는
그대는
영원의 소꿉친구였어요.

시린 가슴
어루만져 주고
호젓한 여행길
휘파람 불며 동행하는
그대는
나 하나의 애인이었죠.

먼 길 종일 헤매다
어둑한 저녁
지친 걸음으로 돌아와
팔베개 베고
포근히 잠드는
당신의 품은
어머니의 가슴이었네요.

당신은 어머니의 가슴
당신은 나의 세상이었네요
사랑과 그리움 모두 안은
영원한 내 노래였어요






영원의 소꿉친구로서의 삶
― 이기순 시인의 시 세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낭산 이기순 시인은 서울오산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봉직하며, 학생과 동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문학적 필력뿐만 아니라 인품에서 비롯된 신뢰는 그의 작품 속 따뜻한 시선과 깊은 울림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오산학교가 춘원, 안서, 소월과 백석의 후예로 자부심을 지켜온 전통을 이어간 것도, 이기순 시인과 같은 문학적 인격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시에는 교사로서의 사명감, 문인으로서의 자긍심, 인간으로서의 진정성이 녹아 있다.

낭산 이기순 시인의 시 「아내」는 단순한 서정의 고백을 넘어, 인간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따뜻한 철학적 기록이다. 작품은 아내라는 존재를 단일한 이미지로 묶지 않고, 친구와 연인, 어머니와 같은 다양한 역할로 변주하며 의미망을 펼쳐낸다. 이러한 시적 접근은 곧 시인의 삶의 태도이자 가치철학과 깊이 맞닿아 있다.

첫 연에서 아내는 ‘영원의 소꿉친구’로 비유된다. 소꿉친구라는 표현은 유년의 무구함을 떠올리게 한다. 결혼이 성인의 제도적 약속이라면, 소꿉친구는 제도와 계약을 넘어선 순수한 유대의 상징이다. 시인은 아내를 단지 동반자로만 바라보지 않고, 세상살이의 무게 속에서도 변치 않는 유년의 우정을 간직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가 말하는 부부란 나이와 제도를 초월해 삶의 향수를 곱게 채워주는 존재다.

여기서 드러나는 시인의 미의식은 ‘결혼=계약’이라는 세속적 관점을 넘어, ‘결혼=순수한 우정의 연속’이라는 깊은 통찰로 확장된다. 이는 교사로서, 문학인으로서 추구해 온 인간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드러낸다.

두 번째 연은 아내의 다정한 위로와 연인의 열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시린 가슴 어루만져 주고”라는 구절은 인생의 상처를 따뜻하게 덮어주는 아내의 존재를 부각하며, 이어지는 “호젓한 여행길 후 파람 불며 동행하는” 구절은 연인의 자유롭고 경쾌한 기운을 전한다. 아내는 위로자이자 모험의 동반자로 자리한다. 시인은 아내를 고정된 이미지에 가두지 않고, 매 순간 변주되는 존재로 그려낸다. 이는 아내가 단순히 보호자나 연인으로 머무르지 않고, 삶을 풍성하게 빛내는 다면적 동행자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연에서는 아내의 품이 ‘어머니의 가슴’으로 비유된다. 하루 종일 헤매다 지친 걸음을 이끌고 돌아와 아내의 품에 기대어 잠드는 장면은, 부부의 사랑이 단순한 애정의 차원을 넘어선 궁극적 귀향임을 드러낸다. 삶의 피곤과 세속의 풍파 속에서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 그것이 곧 아내의 품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아내를 존재론적 안식처로까지 확장하며, 보호와 안식, 무조건적 수용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시인의 아내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금실 좋았던 부부로 살아온 그가 이제 홀로 남아 쓰는 이 시는, 단순한 동행의 묘사가 아니라 이미 부재한 이를 향한 절제된 그리움의 승화이다. 감정의 격정을 앞세우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남은 이가 간직한 사랑을 형상화했기에, 작품은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하늘나라에 간 아내를 향한 헌사의 기록이자, 그리움의 미학적 승화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아내를 향한 인식의 총화를 제시한다. “당신은 어머니의 가슴, 당신은 나의 세상”이라는 고백은 아내라는 존재가 개인의 내밀한 삶을 넘어 세계 전체의 의미망으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아내는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의 축약이 된다. 시인은 일상의 소박한 동행 속에서 우주적 의미를 이끌어내고, 개인의 사랑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 의미를 탐구한다.

요컨대 「아내」는 한 개인의 사적인 노래를 넘어, 인간 존재가 추구해야 할 관계의 본질을 제시한다. 아내는 소꿉친구요, 연인이며, 어머니이고, 동시에 세상이다. 이기순 시인은 그 다층적 비유를 통해 사랑이 단지 감정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존재론적 근거임을 드러낸다. 그의 시적 세계는 언제나 따뜻한 품과 다정한 시선으로 인간을 품어내며, 그 안에서 독자는 자기 삶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낭산 시인의 시는 결국 한 가지 진실을 말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 아내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인생을 완성시키는 거울이자 노래이며 세계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사랑과 헌신, 그리고 따뜻한 동행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힘임을 배운다.

— 청람 김왕식

□ 낭산 이기순 시인


아호 낭산

시인, 수필가, 여행작가
충북 괴산 출생으로 청주고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오산고에서 35년 간 근무했다.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한국작가회의 회
원과, 풀무문학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
으며, 내 나라 내 땅의 진솔한 '우리
것'을 찾아다니고 있다.


지은이의 책으로는
《강물처럼》, 2013(시집)
《독서평가록》1996
《한국인의 문화유산 탐방기》1996
《문학의 고향을 찾아서》 2008
《한국문학 순례 대표 36》 2014
《내 나라 내 땅》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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