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모래시계와 문신 사내
― 찜질방에서 배운 삶의 연단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가끔 찾는 대중목욕탕, 그곳의 찜질방은 내겐 작은 도량[道場]과도 같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방 안에는 언제나 모래시계가 두 개 놓여 있다. 3분짜리, 5분짜리. 단순히 시간을 재는 도구 같지만, 내겐 그것이 하나의 도전장을 내미는 듯 보인다. 시계를 뒤집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인내의 수련생이 된다.
3분은 견딜 만하다.
그러나 5분 모래시계가 시작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4분쯤 지나면 뜨거운 화기가 몸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달구는 듯하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하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친다. 그 순간 희망은 단 하나, “1분만 더 견디면 끝난다.” 바로 그 생각이 나를 버티게 한다. 인간이란 희망의 동물이라 했던가. 끝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망은 다시 인내로 변한다.
드디어 모래알이 모두 가라앉는다. 나는 내심 승리의 환호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마주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는다. 온몸에 화려한 문신을 한 그 사내의 동작은 마치 전쟁에서 다시 북을 울리는 장수의 모습 같았다.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내 묘한 오기가 솟구쳤다. 마치 “너와 나, 누가 더 버티는지 보자”는 무언의 결투가 시작된 듯했다.
함께 있던 이들은 서둘러 문을 열고 뛰쳐나가 냉탕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내 자존심이 모래시계 속에 함께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단순한 찜질이 아니라, 그야말로 죽음의 레이스였다. 뜨거운 열기는 내 땀구멍을 하나하나 태워내듯 스며들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화염을 삼키는 듯했다.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있다면 이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혹독하겠지.”
이상하게도, 나는 그 문신 사내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외려 그는 내 스승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두 번째 5분을 감히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건 그 사내 덕분이었다. 인생에서도 종종 그렇다. 나를 괴롭히는 듯한 상대가 사실은 나를 단련시키는 스승이 된다. 불편한 상황, 힘겨운 만남, 뜻하지 않은 경쟁 속에서 우리는 더 큰 힘을 얻게 된다.
손자병법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평시에 전시를 생각하라.” 찜질방의 그 순간은 전시였다. 숨 막히는 고열 속에서 몸은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평시의 훈련이었다.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자신을 단련할 수 있다면, 진짜 위기 앞에서는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나는 모래시계 앞에서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찜질방과 닮아 있다. 어떤 시간은 따뜻한 온탕처럼 포근하지만, 또 어떤 시간은 뜨거운 열기에 숨조차 막히는 순간이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끝까지 버티게 만드는 희망의 모래시계다. 끝이 있다는 사실, 그 끝 너머 시원한 공기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때로는 문신 사내 같은 경쟁자가 필요하다. 그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잠자는 힘을 깨우기 위해 나타난다. 인생의 경쟁자, 불편한 사람들, 힘겨운 상황이 사실은 내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내 한계를 다시 쓰게 된다.
찜질방의 모래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견디다 보면 끝이 있고, 끝을 알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그날, 모래알이 모두 떨어질 때마다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조금 더 버텨라. 네 안에는 아직 남은 힘이 있다.”
인생은 뜨겁다.
때로는 너무 뜨거워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작은 모래시계를 붙잡는 한, 우리는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만나는 경쟁자들은, 결국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은밀한 스승들이다.
하여
나는 종종 찜질방을 찾는다.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나는 인생의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는다. 그 속에서 웃음 반, 인내 반의 철학을 배우며, 삶의 뜨거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