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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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사랑, 어머니와 누이 사랑
시인 임준빈
상, 하권이 태어나
어느 날 뜬금없이 헤어졌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어머니의 따듯한 가슴
금속활자 속에 배열되어 있는 게송의 온기
서로 만났다, 곧장 이별 후 약속했다
구름과 바람의 힘을 빌어
세상을 안은 하늘, 활자 속에 박힌 별들
저들이 떠나면
마음자리 곳간만 남듯이
별들이 울어 젖힌
골짜기로 허공을 내어 비웠을 뿐
모든 건 그대로인데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고
삶과 죽음은 나란한데
문장과 글씨와 언어와 소리가
하늘에 빗금을 긋듯 집을 짓는다
나 어릴 적 하늘로 떠난
어머니와 누님과 같은
이별도 만남이요
만남도 이별과 같은
거룩한 다짐이듯, 허상의 기록이듯
아아, 무심히 잇어놓은
하늘 비탈에 금 근 노을
그 경계에 침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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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빈 시 세계
ㅡ직지의 사랑과 존재의 기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임준빈 시인의 〈직지 사랑, 어머니와 누이 사랑〉은 단순히 개인적 그리움의 서정을 노래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直指)와 가족적 사랑의 기억을 결합시키며, 인류 문화의 원형과 개인적 상실의 체험을 동시에 직조한 시적 선언이다. 시인은 직지를 단순한 기록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 누이의 다정한 품으로 치환함으로써, 활자 속에 살아 있는 인간적 온기를 불러낸다. 이 작품은 직지에 대한 문학적 애호이자, 동시에 삶의 근본적 질문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첫머리에서 시인은 “상, 하권이 태어나 어느 날 뜬금없이 헤어졌다”라고 말한다. 직지의 물리적 존재를 두 권으로 나뉜 운명으로 그리며, 곧장 그것을 인간 삶의 이별과 겹쳐 놓는다. 여기서 직지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인생의 은유적 상징으로 재탄생한다. 어머니와 누이가 떠난 상실의 기억은 직지의 분리와 포개지고, 개인의 고통은 곧 인류 문명의 기록적 운명과 하나가 된다.
임준빈 시인은 직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기록의 무한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무엇이든 받아들일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 / 금속활자 속에 배열되어 있는 게송의 온기”라는 시구는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낸다. 직지는 활자와 종이로 이루어진 차가운 사물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처럼 무엇이든 품어내는 따스한 공간이다.
문자는 차갑지만, 그 문자 안에 담긴 정서는 뜨겁다. 활자 속 게송은 단순한 종교적 경구가 아니라,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안아내는 인류의 기억이다. 이처럼 시인은 기록을 곧 사랑으로, 언어를 곧 가슴으로 변용한다. 이는 곧 그의 미학이 지향하는 바 ― 언어를 통한 인간 회복 ―이다.
시의 중반부는 철학적 성찰로 이어진다. “모든 건 그대로인데 / 있다가 없고 / 없다가 있고 / 삶과 죽음은 나란한데.” 이 대목은 불교적 무상(無常)의 사유와 노장적 허무의 통찰을 동시에 품고 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흐름 속에 있다.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나란히 흐르는 쌍곡선이라는 깨달음은, 어머니와 누이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시인의 내적 수양이기도 하다. 그는 슬픔을 감상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존재론적 통찰로 승화시킨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이며, 만남은 곧 다시 다가올 이별이라는 순환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후반부에서 시인은 언어의 본질을 다시 환기한다. “문장과 글씨와 언어와 소리가 / 하늘에 빗금을 긋듯 집을 짓는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하늘에 새겨진 집이다. 직지라는 활자 기록물은 곧 인간이 집을 짓듯, 세계 속에 자기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임준빈에게 언어는 추억을 저장하는 그릇이자, 상실을 견디게 하는 영혼의 집이다.
마지막 연에서 “어머니와 누님과 같은 / 이별도 만남이요 / 만남도 이별과 같은 / 거룩한 다짐이듯, 허상의 기록이듯”이라는 구절은 시인의 궁극적 인식에 도달한다. 그는 가족의 죽음을 단순한 상실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한 다짐’이며 ‘허상의 기록’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그림자이자 순환이다. 직지가 기록으로써 존재를 영속시키듯, 사랑도 떠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하늘 비탈에 금 근 노을 / 그 경계에 침묵하고 싶다”는 구절은 그의 시적 태도를 압축한다. 언어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그 경계의 빛을 바라보는 것. 바로 여기에 임준빈 시의 미의식이 있다. 언어는 기록하지만, 침묵은 초월한다.
요컨대, 임준빈 시인의 〈직지 사랑, 어머니와 누이 사랑〉은 개인적 체험과 인류적 기록을 결합시킨 독창적 작품이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상실을 직지라는 세계적 기록유산과 접목시킴으로써, 개인의 기억을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그의 철학은 무상과 순환의 논리 속에서, 언어와 기록이 어떻게 존재를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임준빈의 삶의 가치철학은 명백하다. 사랑과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별 속에서도 남는 것은 언어이고, 언어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의 작품 미의식은 바로 이 진실을 직지와 가족의 상징을 통해 드러내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추모의 시가 아니라, 언어와 존재, 삶과 죽음에 대한 문학적·철학적 묵상이다. 직지를 품은 그의 시는 한국적 정서를 넘어, 인류적 보편을 지향하는 사유의 등불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