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수필가 이기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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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석 단 상
수필가 이기순
추석이고 설이고 명절 때만 되면 고향길 내려가느라 며칠 전부터 마음이 수선스러웠다.
그러던 것이 내 집 제사가 생기고부터는 명절 귀성길이 옛일이 되어 버렸다.
보름 전 벌초를 다녀왔기에 부모님 산소 성묘도 명절 지나고 도로 사정이 한가할 때로 미루었다.
내 집 차례와 제사는 가급적 단출하게 차리려고 한다.
음식 차림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자식들에게 제사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자 나름 노력해 보는 것이다.
음식 차림은 열 가지를 넘지 않도록 하고
당일 다 소비할 수 있도록 적당량만 하자는 것이 내 의견이다.
그런데도 며느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으니 나더러는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 보기에 과분할 정도로 풍성하게 차렸다.
마음 씀씀이가 늘 너무 고맙기만 하다.
차례상 음식 배열이나
차례 진행 순서 등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다.
명절 때면 성균관 유생들이 방송에 나와 전통제례를 강조한다.
과거 그 당시의 음식과 예법을 수백 년 후인 오늘날까지 요구하는 것이 나는 늘 못마땅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 변화이고 발전이다.
과거만을 고집하는 것은 보수도 아닌 수구이며 *묵수墨守다.
새로운 시대 가치를 띠고 변모하는 것이 새로운 전통의 창조가 아니겠는가.
제사는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지 외적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아들이 어릴 때 언젠가 우리 집엔 진품명품이 없느냐 고 물어온 적이 있다.
그 말이 오래도록 귓전에 맴돌았다.
그래, 이 애비가 가보를 하나 만들어 주자.
그래라, 이 아비의 시작품을 서예대가의 글씨로 받으면 나름대로 우리 가문엔 보물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래 나의 대표작 '백두산'을 적어 넣어 8폭 병풍을 장만했다.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대대로 물려가며 잘 보존하고 이어가기를 바라는 심정일뿐이다.
2024. 9. 17.
추석날에 이기순
*묵수墨守
‘묵적(墨翟)이 성(城)을 지켰다.’는 말로, 제 의견(意見)이나 생각, 또는 옛날 습관(習慣) 따위를 굳게 지킴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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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단상, 삶의 철학으로 피어나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기순 수필가의 〈추석 단상〉은 단순한 명절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전통의 의미를 사색하고, 삶의 지향을 문학적 언어로 정리한 성찰의 산물이다.
그는 명절을 맞이하는 설렘, 차례와 제사의 형식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후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정신적 가보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첫대목에서 작가는 고향길과 차례 준비를 회상한다. 과거에는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는 귀성길이 당연한 풍경이었으나, 이제는 집안 제사가 생기며 그 길 또한 옛일이 되었다. 그는 그 변화를 담담히 서술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고집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조율하려는 태도이다.
음식 차림을 단출히 하고, 부담을 줄이며, 정성에 방점을 두자는 그의 생각은 단순한 실용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을 꿰뚫는 철학이다. 의식의 본래 의미는 형식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의 권위를 무조건적으로 고수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과거의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전통의 창조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전통은 지키되 고정된 틀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가치로 계승해야 한다는 깊은 미학적 인식이 담겨 있다.
작품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가보’의 이야기는 이 수필의 백미다. 어린 아들의 질문, “우리 집엔 진품명품이 없느냐”는 물음이 작가의 귓전에 오래 남았다.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한 가문의 정신적 유산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에 대해 작가는 ‘진품명품’의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창작된 작품을 통한 정신적 유산으로 답한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백두산」을 서예로 써넣어 8폭 병풍을 만들고, 그것을 아들, 손자, 증손자에게까지 대대로 물려주기를 소망한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삶을 문학으로 남겨 후대의 가보로 삼고자 하는 작가의 자의식이다. 금은보화가 아니라 시 한 편, 병풍 하나가 후대에 이어질 진정한 명품이라는 철학, 그것이 바로 이기순 수필가의 삶의 중심축이다.
〈추석 단상〉은 일상의 소소한 기록을 넘어선다. 차례상 음식을 단출히 차리는 문제, 제례의 형식을 간소화하는 문제, 후대에 남길 가보를 마련하는 문제,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인간의 삶의 미학으로 귀결된다. 그는 허례허식을 거부하고 본질을 지키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태도로 살아간다. 또한 후대에게 남길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철학을 제시한다.
그의 글은 소박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 깊은 울림이 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담백한 일상의 기록 같으나, 그 속에는 삶에 대한 성찰과 철학적 비전이 응축되어 있다. 단순한 수필의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의 방향성을 묻는 생활철학의 문학화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기순 수필가의 〈추석 단상〉은 형식보다 본질, 과거의 답습보다 새로운 전통의 창조, 물질보다 정신의 유산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그가 교사로서, 문학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온 길과 맞닿아 있다. 그는 학생과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던 인품 그대로, 글에서도 본질을 지향하며 인간다움의 가치에 충실하다. 이 작품은 단순히 명절의 소회를 적은 글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문학적 미의식이 맞닿은 철학적 수필이다.
추석은 달빛처럼 한가위의 풍요를 기리는 명절이지만, 이기순 선생의 글에서는 그 풍요가 형식이나 음식의 다채로움이 아니라, 마음의 정성, 전통의 본질, 후대를 향한 정신적 유산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추석 단상〉은 그래서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후대에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 당신이 지키려는 전통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굳어버린 형식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간의 삶이 결국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한 재산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영원히 남을 정신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새기게 된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