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매미의 울음, 귀뚜라미의 기다림
ㅡ사라짐 속에 이어지는 생의 노래
청람 김왕식
8월의 끝자락이다.
며칠 뒤면 달력은 9월로 넘어간다. 밤새 내린 비가 처마 끝을 타고 떨어진다. 빗줄기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뿌리를 적신다. 여름의 열기를 눅여주고, 가을의 문을 여는 물길이 된다. 비는 아무 말 없이 계절을 옮겨놓는다.
나무에 매달려 울던 매미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한때 여름의 공기를 가득 채우던 목청은 이제 끝을 향한다. 귀뚜라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계절은 언제나 다음 주자를 기다리며 이어진다. 매미가 떠나야 귀뚜라미가 운다.
매미는 땅속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햇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수한 날들을 견딘다. 그러다 어느 여름날 흙을 뚫고 나와 짧은 생을 울음으로 불태운다. 울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최후의 방식이다. 매미는 자기 운명을 알았을 것이다. 오래 준비했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았기에 그토록 치열하게 울었을 것이다.
사람의 삶도 이와 같다. 긴 기다림이 있고, 짧은 기회가 있다. 한 생애의 대부분은 땅속의 매미와 같다. 준비하고 배우며 살아가는 침묵의 시간이다. 그러나 언젠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은 길지 않다. 금세 지나간다. 그렇기에 더욱 치열해야 한다. 매미가 여름 한철을 불살라 울듯, 사람도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의 울음을 내야 한다.
밤비를 들으며 나는 묻는다. 매미는 무엇을 위해 울었을까. 짝짓기와 생명의 유전을 위해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을 넘어선 울음처럼 들린다. 생애 전체를 응축한 울음이다. 땅속에서 보낸 긴 세월을 합해 단 한철에 토해낸 기록이다.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말하지 못한 날들, 쌓여온 시간들이 어느 순간 한마디의 목소리로 터져 나온다. 그것이 문장이 되고, 노래가 되고, 혹은 눈물이 된다.
계절의 이행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진다. 뜨거운 매미의 울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맑은 귀뚜라미의 소리가 들어온다. 매미가 떠나야 가을의 문이 열린다. 인생도 그러하다. 앞세대의 삶이 끝나야 다음 세대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삶은 이어지는 자리를 남기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목소리가 세워진다.
귀뚜라미는 아직 울지 않는다. 그러나 곧 어둠 속에서 울 것이다. 매미의 자리를 잇는 그 소리는 서늘하다. 열정의 계절이 지나가고, 사색의 계절이 오는 것이다. 매미의 울음이 뜨거운 절규라면, 귀뚜라미의 소리는 고요한 기도다. 인생도 젊음의 열정이 끝나면 사색의 시간이 온다. 그때는 목소리가 낮아지고, 울림이 길어진다.
매미의 생은 짧지만 허망하지 않다. 기다림이 길었고, 울음은 절실했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 길고 무심한 날들 속에서 자신만의 울음을 찾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목소리를 남기느냐이다. 매미의 한철 울음이 여름의 기억이 되듯, 사람의 한마디 목소리도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빗줄기는 처마 끝을 스치고, 어둠 속으로 흘러간다. 매미의 울음은 멎었고, 귀뚜라미의 울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계절은 두 소리 사이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이 고요 속에서 묻는다. 매미는 긴 기다림 끝에 짧게 울고 사라졌다. 귀뚜라미는 곧 어둠 속에서 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내 울음을 남길 것인가.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한순간을 어떻게 불태울 것인가.
인생은 결국 계절의 교차와 같다. 앞선 울음이 사라져야 다음 울음이 들리고, 한 생의 시간이 다해야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다. 우리의 삶도 매미와 다르지 않다. 언젠가 다가올 끝을 알면서도 울어야 한다. 그 울음이 허공에 흩어지더라도, 그 목소리가 잠시 세상의 공기를 흔들어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는 멈출 기미가 없다. 나는 빗소리와 어둠 속의 고요한 틈을 듣는다. 매미에서 귀뚜라미로 이어지는 이 단순한 바통 터치가, 인간 삶의 이치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줄 그날을 생각한다. 그날까지, 나는 나의 울음을 아껴두지 않으리라.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