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달팽이
― 느림의 철학
새벽이슬이 내린 길 위로 달팽이가 기어간다. 미끄럽게 남긴 흔적이 빛을 받는다. 속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앞으로 간다. 멈춘 듯 보이지만 멈추지 않았다.
느림이 곧 길이다.
달팽이는 집을 등에 진다. 집은 짐이자 보호다. 무겁게 보이지만, 그 무게가 몸을 지킨다. 보호 없는 가벼움은 자유가 아니라 위험이다. 짐이 있기에 살아남는다. 짐은 늘 불편하지만, 짐이 없으면 존재가 흔들린다.
사람은 느림을 실패로 여긴다. 그러나 느림은 또 다른 방식의 시간이다. 빠름이 거리를 단축한다면, 느림은 공간을 채운다. 빠름이 성취를 만든다면, 느림은 깊이를 만든다. 삶은 거리와 깊이 둘 다 필요하다.
달팽이는 다급하지 않다. 다급하면 껍질 속으로 숨는다. 숨는 동안 세상은 멀어지지만, 몸은 지켜진다. 숨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때로는 생존의 전략이다. 멈춤이 길을 잃게 하지 않는다. 멈춤은 다시 나아가기 위한 간격이다.
달팽이의 발자국은 투명하다. 그 흔적은 오래 남는다. 풀잎 위에도, 돌 위에도 빛나는 선이 남는다. 작고 약한 몸이 지나간 자리라도 길은 기록된다. 삶의 무게는 속도가 아니라 흔적에서 나온다.
사람도 흔적을 남긴다. 빠른 발걸음이 남기는 것은 도착이지만, 느린 걸음이 남기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도착보다 오래간다. 남긴 기억이 곧 남은 사람이다.
달팽이는 집을 버리지 않는다. 불편해도 함께한다. 사람도 짐을 버리고 싶어 하지만, 짐이 곧 자기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관계의 무게, 책임의 무게, 기억의 무게. 짐을 덜면 가벼워지지만, 그만큼 빈약해진다.
느림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빠르게 달리면 풍경은 스쳐간다. 느리게 걸으면 풀 한 포기, 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것이 보일 때 삶은 넓어진다. 속도는 세상을 좁히고, 느림은 세상을 넓힌다.
달팽이는 묻는다.
지금의 속도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빠름 속에 잃어버린 풍경은 없는가. 짐을 벗어던지려는 마음속에,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까지 함께 던지고 있지는 않은가.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