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자 할머니는 나의 스승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맹자 할머니는 나의 스승





"그럴 수 있지?”,
“암,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그랬구나!


할머니의 말씀은 단순한 일상의 푸념처럼 흘러나왔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성경 속 잠언과 다름없는 지혜였다. 글자를 알지 못한 문맹의 삶 속에서도 할머니는 사람과 세상을 품는 말을 노래처럼 읊조리셨다. “그럴 수 있지?”, “암,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짧은 어휘는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허물과 고통을 감싸 안는 깊은 마음이 숨어 있었다.

살다 보면 상대가 거친 언행으로 마음을 건드릴 때가 많다. 누구는 무심코 한 말이지만 듣는 이는 깊이 상처받기 쉽다. 그럴 때 대다수는 분노하거나 서운함에 잠긴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씀은 다르다. 상대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그럴 수 있지”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그 상황 자체를 끌어안는 수용의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배움으로 습득한 지혜가 아니라, 긴 세월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길러낸 삶의 결론이었다.

“암,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은 체념의 소리가 아니었다. 인생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낸 자만이 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사람의 허물을 다 보아온 눈길에서 흘러나온 인정의 화답이었다. 억울함을 안고 살아도 결국은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 아니냐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원망보다 이해를, 고발보다 수긍을 택하는 말은 갈등의 칼날을 무디게 했다.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어투는 상대를 변명하게 하지 않았다. 이미 이유를 다 헤아려 공감해 주는 목소리였다. 누군가 힘겹게 털어놓을 때, 더 묻지 않고 미리 이해해 주는 이 말은 상대의 굳은 어깨를 풀어주고 마음을 놓이게 했다. 결국 할머니의 말은 남의 입장을 자신의 자리에서 대변해 주는 가장 따뜻한 해석이었다.

할머니는 또한 말의 신중함에 대해 깊은 철학을 지니고 계셨다. “입은 세 번만 사용하라. 첫째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둘째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 셋째는 남을 칭찬할 때. 그러나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하고 싶을 때에는 꾹 삼켜 똥으로 빼내라.” 그분의 역설은 언어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말이 곧 사람의 품격임을 일깨워 주는 지혜였다. 많은 교훈을 담은 책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단호하고도 해학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언제나 모든 문제의 해법을 간단히 말씀하셨다. “모두 나의 탓으로 돌리면 된다. 사실 모든 일은 나로부터 기인되는 법이다. 잘된 것은 남의 덕이고, 잘못된 것은 나의 탓이다.” 이 말은 단순한 겸손의 훈계가 아니라, 평생 명심해야 할 삶의 태도였다. 책임을 자신에게 두고 공은 남에게 돌리는 자세는 사람 사이의 다툼을 사라지게 하고, 원망 대신 감사의 마음을 낳았다.

그 말들을 뒤늦게 새기며 깨닫는다. 지식으로 무장한 교훈보다 더 큰 힘을 주는 것은 삶 속에서 우러나온 단순한 말 한마디라는 사실을. 배움 없는 듯 보였던 할머니가 사실은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분은 남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다스려 남을 받아들이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였다. 거칠게 다가오는 세상 앞에서도 “그럴 수 있지”라며 흘려보내고, 억울한 순간에도 “그러면 그렇지”라며 담아두지 않고, 힘들게 털어놓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그랬구나”라며 대신 무게를 덜어주셨다. 그리고 말은 칼이 아니라 생명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나는 이제야 안다. 할머니의 말씀 속에 담긴 모든 가르침이 성경 잠언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글자를 몰라도 지혜의 깊이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외려 세상과 사람을 온몸으로 받아낸 자의 언어는 학문으로 쌓은 지식보다 더 단단하다. 그 말들은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내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할머니는 내 삶에 가장 큰 스승이었다. 책이 아닌 삶으로 가르쳤고, 글이 아닌 말로 깨우쳤다. 그분이 남겨주신 단순한 어투와 신중한 언어철학,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비롯된 탓으로 돌리라는 깨우침이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지혜의 기둥이다. 할머니의 노래 같은 말씀은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질 내 마음의 잠언이 되었고, 살아 있는 언어의 성전으로 내 삶 속에 길이 남아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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