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 김왕식의 연작소설《피맛골 사람들》ㅡ1편 복순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청람 김왕식의 연작소설

《피맛골 사람들》


1편

복순이, 소녀의 공장 굴뚝




굴뚝은 밤낮으로 연기를 토했다.

연기는 잿빛이었고, 하늘은 연기를 삼켜 어둡게 가라앉았다. 공장의 담장은 늘 축축했고, 바람조차 기름 냄새를 머금은 채 드나들었다. 재봉틀의 쇠바늘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기계는 날카롭게 울었고, 소녀들의 손가락은 그 울음에 맞춰 떨렸다. 바늘은 살을 찔렀다. 피는 솜에 스며들었다. 솜은 쉽게 버려졌고, 피는 쉽게 마르고 굳었다.

복순이는 열네 살이었다. 꽃처럼 피어야 할 나이에 공장의 기계와 마주 앉았다. 이름은 꽃을 뜻했으나, 그녀의 하루는 늘 잿빛으로 물들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쓰러져 누워 있었고, 오빠는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는 방 한쪽에서 기침을 했다. 기침은 벽에 부딪혀 금세 사라졌지만, 집 안에는 늘 병의 냄새가 가득했다. 소녀는 더 이상 배울 수 없었다. 학교는 사치였다. 글보다 밥이 먼저였다. 밥보다도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공장의 하루 일당은 국밥 한 그릇 값이었다.

국밥은 배를 채우지 못했다. 소녀는 국밥을 마시듯 삼키고 다시 기계 앞에 앉았다. 손끝에 구멍이 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기계는 사람을 삼켰고, 굴뚝은 그 삼킨 사람들의 연기를 내뱉었다.

해방이 왔다.

해방은 자유를 주지 않았다. 일제의 군홧발은 사라졌으나, 가난의 발자국은 더 짙어졌다. 경찰은 여전히 군홧발을 신고 골목을 짓눌렀고, 시장의 좌판 위에는 굶주린 눈빛이 가득했다. 소녀는 바늘 소리와 군홧발 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하루를 살았다.

그런 날, 공장 앞 골목에서 사내들이 그녀를 불렀다. 담배 연기를 뿜으며 “더 쉬운 일이 있다, 돈은 더 벌린다”는 말을 흘렸다. 그 말은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따뜻함 뒤에는 칼날이 있었다. 소녀는 그 칼날에 베였다. 공장의 굴뚝보다 더 어두운 길로 들어섰다.

다방이었다. 손님들은 웃었다. 웃음은 거칠었고, 술잔은 쉽게 기울었다. 그녀는 웃음을 배웠다.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가면이었다. 가면은 울음을 감추었다. 남자들의 손길은 가볍지 않았다. 어깨 위에 얹힌 손은 무거웠고, 허리춤을 스치는 손은 그녀의 숨을 끊었다. 소녀의 이름은 손님들의 혀끝에서 조롱처럼 불렸다. 꽃은 짓밟혔고, 향기는 술 냄새에 덮였다.

한 번은 손님이 술에 취해 그녀를 길로 밀쳐냈다. 골목 사람들은 보았다.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날 밤 그녀는 포주의 집으로 끌려갔다. 포주는 그녀를 줄 세웠다. 포주의 손아귀는 거칠었고, 욕설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침묵했다. 침묵은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다. 울음은 약점이었고, 침묵은 방패였다.

6·25가 터졌다. 사람들은 피난을 갔다. 도시의 절반이 잿더미가 되었으나, 술과 여자는 여전히 필요했다. 피맛골은 외려 더 붐볐다. 군인과 상이군인, 피란민, 장사꾼이 몰려들었다. 복순이는 다방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주인의 자리에 앉았다.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여인은 다방의 안주인이 되었다.

주인이라 해도 자유는 없었다. 권력은 여전히 골목을 휘둘렀다. 형사들이 술을 마셨고, 정치깡패들이 노래를 불렀다. 돈은 던져졌고, 욕설은 남았다. 그녀는 묵묵히 잔을 닦았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이 있었다. 그 얼룩은 사람들의 한이었다.

시간은 그녀를 늙게 했다. 다방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낙선한 정치인이 다방 구석에서 울었고, 철거민이 술에 취해 욕을 퍼부었으며, 여인숙에서 도망친 여자가 몸을 떨며 앉아 있었다. 군에서 제대하던 청년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학생들이 몰려와 민주를 외쳤다. 피맛골의 다방은 그 모든 목소리를 삼켰다. 복순이는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4·19의 함성이 골목을 흔들었다. 최루탄 냄새가 다방 안으로 밀려왔다. 학생들이 피투성이 얼굴로 다방 안에 쓰러졌다. 그녀는 찬 수건을 내주고, 커피를 내렸다. 곧 군홧발이 문을 걷어찼다. 형사들이 학생들을 끌어냈다. 그들은 욕을 퍼부으며 주전자를 엎질렀다. 끓던 물이 바닥에 흩어졌다. 복순이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커피 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80년 광주의 비명도 다방 창문을 두드렸다. 라디오에서 울리던 곡이 갑자기 끊겼다. 통행금지의 어둠 속에서, 다방의 불빛은 유일한 등불이었다. 사람들은 다방에 모여 웅성거렸다. 복순이는 잔을 닦았다. 닦는 동안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손은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다방의 벽에는 얼룩이 더 짙어졌다. 얼룩은 역사였다. 일제의 군홧발, 해방의 혼란, 6·25의 잿더미, 4·19의 함성, 광주의 비명, 재개발의 굉음까지. 모든 것이 얼룩에 스며들었다. 다방은 그 얼룩을 숨기지 않았다.

철거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굉음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철거 반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골목은 곧 사라진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복순이는 잔을 닦았다. 잔 속의 물결이 흔들렸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사람이 없는 골목도 골목이냐.” 목소리는 낮았지만, 골목을 울렸다.

철거일은 다가왔다. 사람들은 다방에 모였다. 웃음과 울음이 뒤섞였다. 낙선한 정치인은 허망한 눈빛으로 술을 비웠고, 철거민은 다시 욕을 퍼부었다. 청년은 기타를 치며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복순이는 마지막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은 골목에 번졌다. 철거기의 굉음이 다방을 덮쳤다. 창문이 흔들렸고, 벽이 갈라졌다. 커피 향은 꺼지지 않았다.

다방은 무너졌다. 복순이의 그림자는 골목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신문을 돌릴 때, 사내들이 국밥을 먹을 때, 여인들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꽃은 끝내 피지 않았으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순이의 인생은 굴뚝의 연기와 같았다. 연기는 사라지면서도 남았고, 남으면서도 흩어졌다. 그 흩어진 연기는 사람들의 폐 속에 들어왔다. 숨 쉴 때마다 복순이는 되살아났다.

골목은 무너졌으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다방은 여전히 불빛을 켜고 있었다. 잔을 닦는 그녀의 손길, 커피 향, 가면 같은 웃음, 꺾이지 않은 눈빛. 그것들이 여전히 피맛골의 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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