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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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화장실로의 여행
여행은 멀리 떠나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대륙을 건너야 여행이라 부르고, 낯선 언어와 풍광 속에 있어야 여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진정한 여행은 발걸음의 길이가 아니라, 시선이 머무는 깊이에 있다. 안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화장실로 이어지는 짧은 노정조차 마음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여행이 된다.
그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익숙하다고 여겼던 사물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 사소한 것에 귀 기울이는 일이 곧 여행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의 결이 새삼 눈부시고,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먼 나라의 안개처럼 다가온다. 책상 위에 놓인 연필 한 자루에도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고, 벽에 걸린 액자는 또 다른 시간으로 통하는 문이 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지 않던 풍경이 피어나며, 짧은 길 위에서도 사유는 길고 넓게 확장된다.
여행의 본질은 외부 세계의 탐험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성찰이다. 먼 곳으로 떠나도 마음이 닫혀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관광에 머무른다. 짧은 동선을 오가며 세심하게 주변을 살핀다면,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삶의 빛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행은 시공간의 이동보다 존재의 깊이를 묻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걸음은 그 노정을 한층 더 의미 있게 한다. 같은 공간을 오가면서도 서로의 시선을 나누고, 사소한 풍경을 함께 바라볼 때 그것은 둘만의 여행이 된다. 부엌에서 거실로 향하는 짧은 길에서도 손을 잡고 걷는다면, 그 길 위에는 수많은 기억이 깃든다. 두 사람이 함께한 발자국은 땅 위에만 남지 않고, 마음의 지층 속에 새겨진다.
이처럼 여행은 거대한 풍경을 보아야만 가능하지 않다. 마음의 창을 열면 작은 움직임도 세계로 이어지고, 사소한 순간도 길 위의 사건이 된다. 결국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빛을 찾아낼 때, 우리의 일상은 늘 여행 중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동행은 그 여정에 축복을 더한다. 짧은 걸음 하나에도 서로의 숨결이 스며 있고, 눈길 하나에도 함께 걸은 길의 무게가 담겨 있다. 세상 끝까지 떠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머무는 자리마다 길이 열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여행자가 된다.
여행은 삶 그 자체다. 하루하루의 발걸음을 진심으로 딛는 자에게, 안방에서 거실로 가는 길도, 잠깐 들른 화장실까지의 동선도, 모두 의미 있는 여행지가 된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을 때, 그 노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동행의 여행’으로 빛을 낸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