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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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판을 거닐며
시인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 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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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판의 숨결, 겸허의 미학
―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 허형만 시 세계는 늘 낮고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화려한 언어의 장식보다는, 들풀 한 포기와 바람 한 줄기에도 생의 윤리를 발견하는 겸허한 관찰의 시선이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시학 — ‘존재의 미세한 숨결에 대한 경청’ — 을 가장 순도 높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아무것도 피울 것 같지 않은 겨울 들판에서 생명의 기척을 듣는다. 피폐와 고요, 메마름의 한복판에서도 ‘따사로움’을 감지하는 그의 감수성은 생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잇는 깊은 연민의 언어다.
시의 첫머리,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구절은 단순한 풍경의 묘사를 넘어, 존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성찰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선은 눈에 보이는 결핍 속에서도 숨겨진 가능성을 본다. 얼어붙은 대지 속에도 씨앗은 꿈을 꾸고, 바람 끝에서도 따스함을 배운다. 그것이 그의 시학이다 —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도 ‘생명의 낮은 소리’를 듣는 일.
중반부의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는 대목은 역설의 미학이 빛나는 부분이다. 추위를 맞이함으로써 따뜻함의 가치를 아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행복의 결을 깨닫는 인식이다.
이 역설은 허형만 시인의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의 냉기를 피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끌어안고, 그 속에서 ‘살아 있음의 온도’를 재확인한다. 이 구절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겸허함이 깃들어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시인은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라며 봄을 예비하는 생명들의 질서를 포착한다. 여기서 들풀은 단순한 식물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이며, 동시에 ‘기다림의 미학’이다. 허형만의 시는 늘 기다림을 노래한다.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실의 흙 속에 발을 딛고 있는 인내의 시간이다. 흙의 무게가 곧 삶의 무게로 전환되는 구절은, 그의 시가 추상적 위로가 아닌 ‘살아낸 사람의 언어’ 임을 증명한다.
마지막 연의 울림은 그 어떤 선언보다 깊다.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 다섯 줄의 문장은 그의 인생철학을 압축한다. 겉모습으로 타인을 판단하지 말고, 한 사람의 내면에 잠든 생명력을 믿으라는 메시지다. 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인간의 존엄을 떠올리는 그의 시선은, 시인이자 성찰자로서의 깊은 도덕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는 다짐은 단순한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선언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언제나 낮은 자리를 택한다. 그는 겨울 들판처럼 고요하고, 바람처럼 겸손하다. 화려함 대신 진정성을, 언변 대신 침묵의 품위를 선택한다. 그의 시에는 서늘한 바람의 결과 따뜻한 흙의 냄새가 함께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랜 세월 뭇 시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다. 시의 언어가 화려하지 않아도, 그 언어가 품은 마음은 누구보다 크고 깊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결국 ‘관계와 생명, 그리고 겸손’에 대한 시다. 인간과 자연, 나와 타인 사이에도 ‘다가서기 전의 거리’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따스함, 그러나 함부로 스며들지 않는 존중의 간격 — 그곳이 허형만의 시가 머무는 자리다.
이 시는 겨울을 통과하며 배운 겸허의 철학을 담고 있다. 삶이 아무리 매워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그 속에서 따뜻함을 배우는 사람. 바로 그가 허형만 시인이다. 그의 시는 말보다 더 깊은 침묵의 언어로, 독자의 마음에 한 송이 들풀이 되어 피어난다.
그 들풀 하나가 우리에게 속삭인다 —
“겨울 들판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 안에도 봄은 자라고 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