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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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을 듣는 법
사람의 말보다 마음이 먼저 흘러나오는 순간이 있다. 말은 늦게 도착하고, 마음은 먼저 흔들린다. 많은 이들이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말의 표면만 핥고 지나간다. 마음의 결을 듣지 못하면 삶은 자꾸 어긋난다. 깊이를 잃고, 방향을 잃는다. 그래서 마음을 듣는 일은 살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가장 근본의 공부다. 세상을 바꾸는 힘도, 관계를 살리는 숨도, 모두 이 들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을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말에 담긴 의도를 해석하려는 일이 아니다. 말의 빈틈에서 일렁이는 기척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흔히 말의 끝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고요’에 숨어 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비로소 들꽃의 숨결이 들리듯, 관계의 바람이 잠잠해질 때 마음의 미세한 온도가 드러난다. 그래서 마음을 듣는 사람은 먼저 고요를 만든다. 자기 생각을 움켜쥐고 흔들리는 순간, 고요는 사라진다. 고요가 사라지면 마음의 결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표정도 귀가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평소처럼 웃었지만 눈동자가 마르지 않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은 “나 힘들다”라고 이미 말했다. 마음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결국 타인을 지켜낸다.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히 듣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보다 ‘숨’을 읽는다. 숨이 흔들리면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다.
마음을 들으려면 무엇보다 ‘판단’을 멈춰야 한다. 누군가의 힘겨운 이야기가 흘러올 때, 많은 사람은 곧바로 해결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의 실금은 해결책의 크기로 메워지지 않는다. 마음은 해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도착지’를 찾는다. 누군가에게 조용히 도착했다고 느끼는 순간, 마음은 스스로 회복을 시작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누군가가 품고 있다는 감각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누군가에게 도착하게 해주는 일’이다.
마음을 듣는 사람은 상대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슬픔이 놓일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이다. 마음은 ‘자리’를 얻는 순간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사람이 가장 아파지는 이유는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이 놓일 자리를 찾지 못해서다. 듣는다는 것은 그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여기 앉아도 괜찮다’고 허락하는 일이다. 이 허락이 사람을 살린다.
마음을 듣는다는 것은 또한 자기 마음의 불꽃을 잠시 내려놓는 훈련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기 사연의 불씨를 품고 산다. 그 불을 끄지 못하면 타인의 마음을 볼 수 없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자기 안의 불길을 낮춰야 한다. 불이 잦아들면 바람의 소리가 들리듯, 마음이 잠잠해지면 타인의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결국 들음은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비우는 과정이다. 담겼던 욕심을 내려놓고, 고집을 풀고, 인정과 체면을 한 겹 벗기는 일이다. 그 비움이 깊어질수록 들음의 폭은 넓어진다.
이렇게 마음을 듣는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는 부드러워진다. 서로의 말을 밀치지 않고, 서로의 슬픔을 경청하며, 서로의 기쁨을 겸손하게 바라보는 공동체가 세워진다. 마음을 듣는 능력은 특정한 재능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선물이다. 한 사람의 마음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의 외로움은 절반으로 줄고, 세계는 조금 더 따뜻해진다.
세상은 점점 더 요란해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듣는 법을 아는 사람은 늘 적다. 앞으로는 말 잘하는 사람보다 마음을 잘 듣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 그 한 사람의 들음이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를 이어 붙이고, 상처를 봉합한다. 마음을 듣는다는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조용한 기술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 흔들림을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누군가의 삶에 작은 빛이 된다. 마음을 듣는 일이 결국 사람을 살린다. 그리고 그 들음이 쌓여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당신은 그 세계의 첫 번째 숨이 된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