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문학평론가]
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6편
■
눈 감고 간다
윤동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따라.
(1941.5.31)
■ 윤동주의 〈눈 감고 간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눈 감고 간다〉는 길고 복잡한 설명을 버리고, 가장 짧은 말로 한 시대의 윤리와 한 인간의 결심을 압축해 놓은 시다.
윤동주의 시 세계는 늘 ‘부끄러움’에서 시작해 ‘길’로 끝난다. 그가 말하는 길은 출세의 길도, 성공의 길도 아니다. 자기 영혼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끝내 걸어야 하는 길이다.
이 시는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지침서이며, 동시에 시대의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게 품어야 할 작은 등불 같은 문장이다.
시의 첫 호명은 유난히 맑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윤동주는 독자를 ‘사람들아’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이들아’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두 겹의 뜻이 있다. 하나는 순결과 가능성이다. 아직 때가 덜 묻은 마음, 아직 세상에 길들지 않은 눈. 다른 하나는 연약함이다. 어둠이 덮치면 가장 먼저 떨게 되는 존재, 그러나 동시에 어둠 속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존재. 윤동주는 그 아이들에게 태양과 별을 맡긴다. 태양은 낮의 절대적 진실이고, 별은 밤의 작은 약속이다. 윤동주의 세계에서 빛은 늘 두 형태로 온다. 눈부신 확신으로 오기도 하고, 사라질 듯한 희미함으로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둘을 모두 사랑하라고 말한다. 큰 진실만 믿지 말고, 작은 진실도 놓치지 말라는 당부다.
그러나 시는 곧바로 현실의 어둠을 제시한다.
“밤이 어두웠는데 / 눈 감고 가거라.” 이 대목이 이 시의 핵심이다. 윤동주는 어둠을 없애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둠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어둠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도피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윤동주의 ‘눈감기’는 역설적으로 더 깊은 눈뜨기다. 바깥의 빛이 사라진 시대에는, 눈을 크게 뜰수록 더 쉽게 흔들린다. 외려 눈을 감아야만 자기 안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다. 윤동주는 살아남는 방식의 윤리를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용기만이 용기가 아니라, 고요히 버티는 용기도 있다는 것을.
이 시가 더 특별한 이유는, 그 길이 추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가진 바 씨앗을 / 뿌리면서 가거라.”
윤동주는 마음만 지키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씨앗을 뿌리라고 한다. 씨앗은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임의 상징이다.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지금 당장 열매를 거두지 못해도, 미래를 위해 손을 더럽히는 일이다.
윤동주는 어둠을 탄식하는 대신, 어둠 속에서도 할 일을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윤동주의 윤리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선언을 하지 않는다.
대신 “뿌리면서 가거라”라고 말한다. 작은 선행, 작은 결심, 작은 진실을 계속 남기며 걸어가라는 말이다. 이 문장이 감동적인 것은, 윤동주가 희망을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심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는 한 번 더 반전의 명령을 내린다.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어둠이 계속되니 눈을 감고 가라고 해놓고, 돌이 채이면 눈을 ‘와짝’ 뜨라고 한다. 이 도치된 명령은 윤동주의 현실 감각을 보여 준다. 그는 낭만적인 위로를 하지 않는다. 눈감고 가는 것은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방법이지만, 위험을 모른 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돌에 채인다는 것은 고통의 순간이며 현실이 던지는 경고다. 그때는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다. 윤동주는 인간이 계속 영적인 자세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삶은 육체이고, 발뿌리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혼의 눈감기와 현실의 눈뜨기를 동시에 말한다.
이 균형이 윤동주를 고귀하게 만든다. 그는 이상만 말하지 않고, 생존만 말하지도 않는다. 둘을 함께 붙잡는다.
이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문장의 숨결이 정확하다는 데 있다. 짧고 단단하다. 꾸밈이 없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가벼움이 아니라 절제에서 나온 품격이다. “눈 감고 가거라”의 단호함, “뿌리면서 가거라”의 조용한 성실함, “와짝 떠라”의 생생한 현실감. 윤동주는 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세련된 말을 찾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는 말, 살기 위해 필요한 말을 남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가 바뀌어도 낡지 않는다. 인간이 어둠을 겪는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눈 감고 간다〉는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어두운 시대에도 걷되, 씨앗을 뿌리며 걷고, 넘어질 돌을 만나면 눈을 크게 뜨라는 것. 이것은 도덕 교과서의 훈계가 아니다. 1941년, 가장 어두운 시대를 통과하던 한 청년 시인의 체험에서 나온 살아 있는 명령이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다음 사람의 길에 씨앗을 남기고자 했다. 그 마음이 이 시를 맑게 한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읽는 일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독자에게도 질문이 된다. 지금의 어둠 앞에서 무엇을 뿌리며 걸을 것인가. 흔들리는 밤에 눈을 감고도 지켜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그리고 발뿌리에 돌이 채일 때, 눈을 와짝 뜨고라도 지켜야 할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윤동주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태양과 별을 사랑할 용기를 남겨준다.
■ 달삼과 오산학교 문예교사 청람의 대화
문예반실 문고리가 차갑게 울렸다.
달삼이 문을 여는 소리는 늘 작았다. 큰소리로 들어오면, 시가 먼저 도망갈 것 같아서였다. 교복 위로 얇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복도 끝 창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바깥 어둠이 틈새로 흘러 들어왔다. 그 어둠은 전등 아래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밤이 교실 안까지 와 앉아 있는 것처럼.
청람은 책상 위에 시집을 펼쳐 두고 있었다.
페이지는 얇았고 글씨는 작았다. 그런데 그 작은 글씨들이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문학의 힘이란 늘 그런 것이었다. 큰 소리 없이 사람을 밀어 붙인다.
달삼은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교복 어깨에 가방 끈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말할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었다. 그는 잠깐 창밖을 바라봤다. 운동장은 어두웠고, 가로등 불빛 아래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누군가 농구공을 한 번 튀겼다. 탁— 그 소리가 이상하게 외로웠다.
달삼이 낮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눈을 감고 가라는 말이 자꾸 남습니다.”
청람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어떤 날의 말인지 알았다. 하루가 길었고 마음이 어지러웠을 때, 사람은 자꾸 ‘눈을 감고’라는 문장을 찾아낸다.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버티고 싶어서.
청람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
달삼은 교복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계단 내려오다 발이 한번 걸렸습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사소한 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돌 때문인지, 제가 급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청람이 조용히 말했다.
“돌 때문이기도 하고, 급해서이기도 하지.”
달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오늘의 시였다. 윤동주의 〈눈감고 간다〉. 종이는 여러 번 접혀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이미 몇 번을 펼쳤다는 흔적이었다.
달삼이 읽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읽는 목소리는 교복 깃 속에서 나왔다.
부드럽지만 얕지 않았다. 청람은 그 호명에서 이미 윤동주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부른다는 건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지키려는 태도였으니까.
달삼이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윤동주는 왜 하필 ‘아이들아’라고 부릅니까?”
“그냥 ‘사람들아’라고 해도 되잖아요.”
청람은 짧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달삼이 잠깐 멈췄다.
“그럼 어른들은요?”
청람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망가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덧붙였다.
“윤동주는 그걸 슬퍼했다.”
달삼은 다시 시를 읽었다.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달삼의 목소리가 여기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이해의 흔들림이 아니라, 현실의 흔들림이었다.
달삼이 말했다.
“선생님, 이건 너무 낯섭니다.
어두우면 눈을 떠야 하잖아요.”
그는 잠깐 말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그런데 왜 윤동주는 눈을 감고 가라고 합니까?
이건… 위험한 말 아닙니까?”
청람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윤동주는 위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청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위험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달삼이 물었다.
“그런데 왜 감으라고 하죠?”
청람이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교실 불빛이 흔들리며 번져 있었다.
“달삼아, 어둠이 깊을수록 눈은 더 쉽게 속는다.”
청람이 말했다.
“네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공포일 수도 있고
남들이 만든 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요한 말을 짚었다.
“윤동주의 ‘눈감기’는 외면이 아니라 방향을 지키는 일이다.”
달삼이 속으로 되뇌었다.
“방향을 지킨다…”
청람이 이어 말했다.
“눈을 감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마음으로 외워둔 길이다.”
달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워둔 길’이라는 표현이 너무 정확해서,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달삼은 다시 읽었다.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달삼이 이번엔 웃었다. 아주 짧게.
웃음이 아니라, 뜻밖의 놀람이었다.
“선생님, 이건 더 신기합니다.”
달삼이 말했다.
“눈도 감고 가는데, 씨앗을 뿌리면서 가라니요.
왜 윤동주는 어두운 밤에 씨앗을 뿌립니까?”
청람은 그 구절이 윤동주의 기도와 같다고 생각했다.
확신이 있어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뿌리는 마음.
청람이 말했다.
“씨앗은 보이는 곳에만 뿌리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뿌릴 수 있다.”
달삼이 물었다.
“어떻게요?”
청람은 짧게 답했다.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하면서 가는 거다.”
달삼이 조용히 말끝을 받았다.
“작은 친절 같은 거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친절, 작은 절제, 작은 용기.”
청람은 말을 더 줄였다.
“윤동주의 씨앗은 그런 것들이다.”
달삼은 시의 마지막으로 갔다.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달삼이 이 구절에서 숨을 한번 들이켰다.
“선생님, 결국 여기서 윤동주가 뒤집습니다.”
“눈 감고 가라면서요.
그런데 돌이 채이면 눈을 ‘와짝’ 뜨랍니다.”
달삼은 약간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럼 처음 말은 틀린 겁니까?”
청람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주 명료하게 답했다.
“처음 말은 ‘영혼’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말은 ‘삶’을 위한 것이다.”
달삼이 조용히 되물었다.
“영혼과 삶…”
청람은 이어 말했다.
“윤동주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는 마음을 지키고,
위험 앞에서는 눈을 크게 떠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마무리했다.
“그 균형이 윤동주의 품격이다.”
달삼은 종이를 접었다.
이번엔 접는 손이 이전보다 차분했다. 시가 낯설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잠깐 앉았을 뿐인데도 교복이 조금 편안해 보였다.
달삼이 말했다.
“선생님, 저는 늘 눈을 감는 걸 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단단해졌다.
“눈을 감는 것도 용기일 수 있군요.”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남겼다.
“달삼아, 어둠이 끝나서 길이 오는 게 아니다.”
“걸어가면… 길이 생긴다.”
달삼은 그 말을 듣고 창밖을 봤다.
어둠은 여전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밝아졌다.
윤동주의 시가 그랬다.
세상을 밝힌 게 아니라, 사람 속을 밝힌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