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7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문학평론가]
윤동주 시인 - 제1부 부끄러움의 시작
- 7편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의 〈간〉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간〉은 한 인간의 내면을 해부해 보여 주는 시가 아니다. 외려 “내가 나를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한 편의 신화적 장면으로 바꿔 세워 놓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 ‘간’은 단순한 장기가 아니다. 삶의 중심부, 양심의 살점, 그리고 시대의 어둠을 견뎌내는 영혼의 핵심이다. 윤동주는 마음이라 말하지 않고 간이라 말함으로써, 윤리와 고통을 추상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이 시가 강렬한 이유는, 고통을 감상으로 다루지 않고 생리처럼 드러내기 때문이다. 참회의 언어가 이마가 아니라 배 속에서 울리는 시, 그것이 〈간〉이다.

시의 첫 장면은 바닷가이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햇빛은 생명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위로가 아니라 ‘말림’의 도구로 작동한다. 젖은 간은 피곤한 마음이고, 눅눅한 양심이며, 눌린 시대의 고통이다. 윤동주는 그 젖음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말리겠다고 말한다.
이 ‘말리기’는 치유가 아니라 결심에 가깝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햇빛 아래에서 자기의 핵심을 드러내는 일. 윤동주의 정신은 언제나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하다. 부끄러움이 그에게는 감정이 아니라 훈련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토끼의 비유는 이 시의 긴장을 한층 높인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코카서스’라는 낯선 지명은 공간의 이국성보다 ‘도망’의 현실을 강조한다. 이 시의 토끼는 귀여운 동물이 아니라, 죽음을 피해 뛰는 존재다. 그리고 그는 ‘간’을 지키기 위해 빙빙 돈다. 직선으로 달리지 못하는 삶, 제자리에서 맴돌며 방어해야 하는 삶. 윤동주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 직진의 윤리를 알고 있었다. 하여, 그의 결심은 언제나 위대한 돌파가 아니라, 초조한 경계와 지속되는 긴장으로 나타난다. 도망치는 토끼의 몸짓으로 “끝까지 지키는 일”을 말하는 윤동주의 방식은 섬뜩할 만큼 정확하다.

그런데 이 시는 다음 순간, 더 놀라운 제안을 던진다.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지키겠다고 했던 ‘간’을 이제는 뜯어먹으라고 한다. 여기에는 윤동주의 내면이 가진 이중의 진실이 있다. 그는 간을 지키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간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 차라리 뜯어 먹히고 싶다.
이 대목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윤리다. 독수리는 세상의 폭력일 수도 있고, 현실의 억압일 수도 있으며, 자기 내면의 엄격한 양심일 수도 있다.

윤동주는 그 독수리에게 말한다. “시름없이” 먹으라고. 여기서 윤동주의 품격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찢는 것조차 원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내어준다. 그 담담함이야말로 윤동주 시의 비극적 아름다움이다.

“너는 살지고 /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이 한 줄은 자기 보존의 본능을 거슬러 세운 윤리의 문장이다. 누가 살지고 누가 여위는가. 윤동주는 자신이 여위는 쪽을 택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학대가 아니다.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나만 살찌는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는 사람의 선택이다. 그에게 윤리는 체면이 아니라 몸의 방향이다. 살아남되, 자신만을 위해 살찌지 않겠다는 결심. 이 결심이 이 시를 감동적으로 만든다. 이 감동은 눈물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결기에서 오는 감동이다.

이어지는 “거북이야! /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는 대목은 고통 속에서도 웃음이 섞인 윤동주의 자각을 보여 준다. 거북이는 한국 설화 속 존재이면서 동시에 ‘유혹의 전달자’다. 용궁은 달콤한 안락, 타협, 현실의 편리함이다. 윤동주는 그 유혹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 떨어진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강한 선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다. 윤동주의 시는 늘 타인을 설득하기보다 자신을 붙드는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자기 약함을 알기 때문에 더욱 다짐한다. 유혹 앞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미리 말로 자신의 발목을 묶어 둔다.

마지막으로 이 시는 신화의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는 여기서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로 겹친다. 그러나 영웅으로서의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처벌받는 프로메테우스를 불러온다. ‘불’은 문명의 빛이자 인간의 양심이며, 시인의 언어일 수 있다. 그 불을 훔친 죄로 그는 맷돌을 단다. 맷돌은 삶의 무게이며 시대의 형벌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여기서 단순히 ‘끝없이 벌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끝없이 침전하는”이라고 말한다. 침전은 가라앉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라앉으며 더 맑아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윤동주의 고통은 단지 추락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방식이다. 그는 올라가려 하지 않고 내려가며 진실에 닿는다.
이 ‘침전’의 미학이 윤동주를 윤동주답게 만든다. 소리치지 않는 저항, 화려하지 않은 결단, 그러나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 영혼의 무게.

〈간〉은 결국 “나의 핵심을 말리고, 지키고, 뜯어 먹히고, 다시 다짐하며, 끝내 침전하는” 한 존재의 기록이다. 이 시가 오래 남는 이유는, 인간이 겪는 윤리적 고통을 가장 생생한 육체의 언어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시대의 어둠을 탓하기 전에 자기 간을 꺼내 놓았다. 그 정직함이 그의 시를 빛나게 한다. 그는 위로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부끄럽지 않은 방향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언제나 가장 아픈 곳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독자는 알게 된다. 윤동주가 말린 것은 장기가 아니라,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이야말로, 어둠 속에서도 가장 밝은 존재라는 것을.





■ 달삼과 오산학교 문예교사 청람의 대화





문예반실 창문이 “덜컹” 하고 한 번 울렸다.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 복도 창을 급하게 닫은 탓이었다. 겨울로 들어가기 직전의 저녁, 학교는 일찍 어두워지고 어둠은 늦게 물러났다. 형광등 불빛은 밝았지만, 사람 마음까지 밝히진 못했다. 교실이라는 곳은 늘 그런 곳이었다. 빛은 있는데,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청람은 문예반실 뒤편 책장 앞에 서 있었다.
낡은 시집들 사이로 손을 넣어 한 권을 꺼냈다. 윤동주. 책등이 닳아 있었다. 몇 번이고 같은 페이지를 펼친 사람의 손길이 남아 있는 책이었다. 청람은 그 책을 책상 위에 놓고도 바로 펼치지 않았다. 먼저 의자를 반쯤 밀어놓았다. 누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는 동작이었다.

문이 열렸다.
달삼이 들어왔다.
교복 단추는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숨이 조금 가빴다. 운동장을 뛰어온 숨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달아난 숨이었다. 달삼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책상 앞에 서서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얇은 종이 위에 짧은 시. 윤동주의 〈간〉.

“선생님.”

달삼이 말했다.

“이건… 시가 아니라 형벌 같습니다.”

청람은 종이를 받지 않고, 먼저 달삼의 얼굴을 봤다.
시를 읽고 난 얼굴엔 늘 ‘빛’이 아니라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람이 잠깐 말을 잃는다.

“어디가 형벌 같았냐.”

달삼은 시의 첫 줄을 읽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달삼이 손가락으로 ‘간’을 짚었다.

“선생님, 왜 하필 ‘간’입니까?”
“가슴도 있고, 심장도 있고, 마음도 있잖아요.”

달삼은 잠깐 말을 고르고 덧붙였다.

“간은 너무… 살덩이 같습니다. 너무 적나라합니다.”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은 문학의 표면을 벗겨낸 질문이었다.

“윤동주는 마음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다.”

청람이 말했다.

“그는 고통을 장식하면 거짓이 된다는 걸 알았다.”

잠시 멈추고, 정확히 찍었다.

“그래서 ‘간’이다.”

달삼이 물었다.

“간이… 뭡니까?”

청람은 책상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양심의 살점이다.”

청람이 말했다.

“그리고 시대를 견디는 가장 아픈 곳이다.”

달삼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다시 읽었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달삼이 갑자기 웃을 듯 말 듯한 얼굴이 됐다.
웃길 구절이 아닌데, 구절이 너무 낯설어서였다.

“선생님, 토끼가 왜 코카서스에서 도망옵니까?”

“그리고 왜 ‘빙빙’ 돕니까?”

달삼은 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왜 이렇게 제자리만 도는 느낌이죠?
이게… 시지프스 같기도 합니다.”

청람의 눈빛이 잠깐 더 깊어졌다.
달삼이 오늘, 새로운 문을 열었다는 표정이었다.

“맞다.”

청람이 말했다.

“빙빙 도는 건 겁이 아니라 구조다.”

“구조요?”

“그래.”

청람은 낮게 말했다.

“윤동주가 살던 시대는 직선으로 걷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똑바로 가면 부서지고, 똑바로 말하면 잡혀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였다.

“그러니 ‘돌아’야 한다. 그러나 중심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달삼은 그 말이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들렸다.
시가 시처럼 멀어지지 않고, 삶처럼 가까워졌다.
달삼은 다음 구절로 내려갔다.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달삼이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질문이 아니라 거의 항의였다.

“선생님, 이건 더 잔인합니다.”
“간을 지키자고 해놓고, 이제는 독수리한테 뜯어먹으라고 합니다.”

달삼이 숨을 내쉬었다.

“이건 자학 아닙니까?”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단호했다.

“자학이 아니다.”

청람이 말했다.

“윤동주는 자기를 부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거짓을 부수려는 사람이었다.”

달삼이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뜯어먹으라고 합니까?”

청람이 한 박자 쉬었다.

“달삼아.”
“고통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청람은 목소리를 낮추어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선택한다.
고통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한 줄로 정리했다.

“‘뜯어먹어라’는 패배의 말이 아니라,
거짓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달삼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지기 싫어서’가 아니라 ‘속기 싫어서’라는 뜻임을 알아채기 시작한 얼굴이었다.
달삼은 이어 읽었다.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달삼이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이게 제일 아픕니다.”
“왜 윤동주는 늘 자기가 여위어야 합니까?”
“왜 이 사람은 자기를 살찌게 두지 못합니까?”

청람은 그 질문을 오래 잡고 싶지 않았다. 오래 잡으면 눈물로 흐를 것 같아서였다. 대신 짧게, 그러나 깊게 말했다.

“윤동주에게 ‘살찌는 삶’은 위험했다.”

청람이 말했다.

“자기만 편해지는 순간,
자기만 괜찮아지는 순간,
그는 자기 간이 썩는다고 느꼈다.”

달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윤동주의 여윔은… 벌이 아니라 선택이군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윤동주는 ‘착한 척’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 거다.”

달삼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달삼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설화가 나옵니다.”
“왜 거북이입니까?
윤동주는 지금 신화와 설화를 섞어 버리잖아요.”

청람이 바로 답했다.

“윤동주는 지금 ‘유혹’에 대해 말하는 거다.”

“유혹이요?”

“그래.”

청람이 말했다.

“용궁은 편안함이다.
달콤한 타협이다.
고통을 잊게 하는 자리다.”

청람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런데 윤동주는 그걸 ‘유혹’이라고 부른다.
이 시에서 유혹은 행복이 아니라 함정이다.”

달삼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삶에도 용궁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달삼이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달삼이 여기서 완전히 멈췄다.
그는 종이를 내려놓고 청람을 바라봤다.

“선생님.”

달삼이 말했다.

“이건… 시지프스입니다.”
“바위를 밀어 올리듯,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가라앉고…”

달삼은 자신의 말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덧붙였다.

“왜 윤동주는 끝을 안 줍니까?
왜 끝없이 반복하게 만듭니까?”

청람은 그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외려 그 질문이 오늘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달삼아.”

청람이 말했다.

“까뮈가 시지프스를 말할 때,
불행을 강조하려고 한 게 아니다.”

달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요?”

청람이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부조리를 아는 인간의 품격을 말한 거다.”

달삼이 되물었다.

“품격…”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위는 굴러떨어진다.”
“세상은 뜻대로 안 된다.”
“선한 사람도 다치고, 진실한 사람도 굶는다.”

청람의 말은 감정 없이 냉정했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걸 아는데도 다시 올라가는 사람.”
“그게 시지프스고, 그게 윤동주다.”

달삼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윤동주의 ‘끝없이 침전’은… 절망이 아닙니까?”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침전은 무너짐이 아니다.”

청람이 말했다.

“탁한 것이 가라앉고, 맑은 것이 남는 과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박았다.

“윤동주는 깊어지는 방식으로 산다.”

달삼은 그 말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자기 안의 돌 하나가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그는 다시 종이를 집어 들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달삼은 이번에는 그 문장을 다르게 읽었다.
불쌍한 문장이 아니라, 견디는 문장이었다.
달삼이 낮게 말했다.

“선생님… 결국 이 시는
바위를 미는 이야기군요.”
“간을 말리는 이야기지만,
똑같이… 다시 하는 이야기.”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윤동주의 신화는 산 위에 있지 않다.”

청람이 말했다.

“윤동주의 신화는… 네 안에 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덧붙였다.

“너의 간을 지키는 일.”

달삼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이번엔 구겨지지 않게, 반듯하게 접었다.
그가 문예반실 문을 열기 직전, 한마디를 남겼다.

“선생님.”
“저는 바위를 밀 자신이 없는데요.”

청람은 대답을 길게 하지 않았다.
윤동주의 문장처럼 짧게 말했다.

“밀 자신이 있어서 미는 게 아니다.”
“그냥… 밀어야 해서 미는 거다.”

복도로 나간 달삼의 교복 뒷모습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문예반실에는 스탠드 불빛만 남았다.
그리고 청람은 혼잣말처럼, 그러나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낮게 말했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고,
윤동주가 간을 말린다.”
“둘 다 같은 말이다.”
“살아 있는 동안, 부끄러움을 지키는 법.”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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