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거울, 그리고 서머싯 모옴의 《면도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서머싯 몸의 《면도날》









무딘 면도날 앞에서
— 아침, 거울, 그리고 《면도날》



청람 김왕식






아침이었다.
세면대 위로 엷은 수증기가 떠올랐다. 창밖 빛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았고, 거울 속 얼굴은 밤의 잔여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물을 몇 번 끼얹고 고개를 들자, 듬성듬성 거칠게 돋은 수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턱을 쓸어보니 모래알처럼 까칠했다. 면도기를 들었다. 거품을 펴 바르고 천천히 날을 대었다.

면도날은 무뎠다.
날은 미끄러지지 않았고, 밀리지도 않았다. 수염은 잘려 나가지 않고 비틀려 들렸다. 거울 속 얼굴이 잠깐 일그러졌다. 한 번 더 밀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무딘 날은 수염을 베지 못하고 그저 피부 위를 지나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오래 전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고교 시절, 책상 위에서 밤늦도록 넘기던 책의 한 장면.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었다.

그 소설은 한 청년의 성공담이 아니었다. 외려 성공이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영혼의 탐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다. 그저 묘하게 서늘하고 오래 남는 문장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지금 아침, 무딘 면도날 앞에서 그것이 다시 또렷해졌다.

래리 대럴은 전쟁을 겪고 돌아온 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안정된 직업과 결혼, 체면 있는 미래를 권하지만 그는 그 길을 거부한다. 대신 묻는다. 인간은 왜 고통받는가.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들은 지금도 낡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에 더 가까워졌다. 모두가 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울 앞에서 다시 면도날을 움직였다.
무딘 날은 여전히 제대로 깎지 못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오늘의 삶과 닮아 보였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깎아내리며 산다. 불필요한 것을 줄이고, 남에게 보일 표정을 다듬고, 스스로를 관리한다. 그러나 도구가 무디면 아무것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 상처만 남는다.

《면도날》은 바로 그 무딘 삶을 겨눈 작품이다.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보면 이 소설은 더 절실하다.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과 더 높은 평판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그 속도에 비해 의미는 자꾸 비어 간다. 잘 사는 법은 배우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다. 래리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스펙을 쌓는 대신 자신을 들여다본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경로 이탈자다. 그러나 그의 방황은 반항이 아니라 수행이다.

나는 턱선을 따라 다시 날을 세웠다.
이번에는 천천히 움직였다. 피부가 먼저 느껴졌다.
거울 속 얼굴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다. 돈과 지위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 사랑조차 계산 속에서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숨기기 위해 허영으로 버티는 사람. 몸은 그들을 냉정하게 그리면서도 조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약하고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면도날》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성공보다 삶을 묻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는 효율을 숭배한다. 느린 사유는 뒤처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혼의 성장은 본래 느리다. 래리는 그 느림을 받아들인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설명할 수 없어도, 자신이 납득하는 삶을 선택한다.

나는 면도를 마치고 물로 얼굴을 헹구었다.
수증기가 거울을 흐리게 했다. 손으로 닦아내자 다시 얼굴이 나타났다. 조금은 말끔해졌지만,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외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면도날》이라는 제목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진리로 가는 길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위태롭다. 오늘의 삶도 다르지 않다. 비교와 소비의 소음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다. 남들이 정해 준 행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비록 불편하더라도 스스로 납득하는 길을 걸을 것인가.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생각했다.

무딘 면도날은 수염을 제대로 베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오히려 손의 움직임을 더 조심스럽게 만든다. 삶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는 날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한다.

거울 속 얼굴이 잠깐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사람은 조용히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그 아침 나는 다시 한 번 믿게 되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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