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역경이 와도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콩나물처럼 팍팍 자란다. 옆집에는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과 같은 나이의 친구가 산다(이하 ‘옆집 딸’이라 하겠다). 옆집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 부터 왕래하며 친하게 지낸 곳이고, 남편의 사고 이후부터 맡길 곳이 없는 딸을 더 자주 맡기게 되며 신세를 지게 된 고마운 이웃사촌이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네 집으로 놀러갔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 별이는 괜찮아?
옆집 딸의 엄마에게서 다급히 전화가 왔다. 이유인즉, 옆집 딸이 다니는 태권도장에 코로나가 터졌는데 본인의 딸이 걸렸으니 내 딸도 확인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소 딸의 면역력은 뽀빠이급이었고, 조심성이 너무 많아 손 소독도, 위생성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킨 아이라 큰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딸은 열도 나지 않았고 너무나 멀쩡했다.
'역시 내 딸~'
-38.9
코로나는 강력했다. 딸은 저녁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정말 미안했지만, 딸의 코로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나의 방사선치료다. 딸의 코로나 감염으로 인해 나 역시 격리 대상이 되어 버려 바깥으로의 출입이 불가했고, 방사선치료는 일주일이 연기되어버렸으며, 나의 방사선 종료일도 일주일이 미뤄지게 되었다. 당연히 남편이 매일 받는 뇌병변환자의 재활치료도 미뤄지게 되었다. 우리 세식구는 불안에 떨며 격리된 채 셋이서 복작거리게 생겼다.
좋지않은 예감은 언제나 틀린적이 없다. 다음날 남편도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이에 나의 격리기간은 하루 더 늘어나게 되었다. 진짜 '젠장맞을' 이다. 여기서 나까지 코로나에 걸려버리면 내 방사선치료는 더 길어진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방사선치료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나. 나다. 가장 최근에 수술을 한, 가장 면역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나다. 남편과 딸은 어떻게든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코로나에 걸려버리면 방사선이고 나발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가장 건강해야 하고, 내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깨닫게 된 코로나 사건.
"엄마는 괜찮아?“
38도가 넘는 고열을 오가면서도 나의 안위를 물어와주는 나의 작은 딸. 이제는 작은 딸이라 하기엔 많이 커버렸지만 여전히 작고 소중한 내 딸. 딸에게는 언제나 한없이 미안한 못난 엄마다.
지금까지 엄마가 아빠를 위해서 살아서 미안해.
엄마가 엄마를 위해 오롯이 살지 못해 미안해.
아직은 엄마가 엄마를 소중히 할 여유가 없어서 미안해.
아직 엄마가 괜찮지 않아서 미안해.
딸과 남편이 코로나에 걸린 후 악착같이 마스크를 쓰며 지냈더니 귀 뒤에 물집이 잡혔다. 이 물집은 절대 코로나에 걸리지 않겠다는 강한의지였다. 다행스럽게도 딸은 하루 정도 38도를 넘는 고열에 시달린 후, 이내 열이 떨어지면서 금새 괜찮아졌다. 옆집 딸도 마찬가지였다. 두 딸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며 좋아하고는 일주일 더 빨리 맞게 된 봄방학을 즐기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둘이 신나게 놀아댔다.
"그래도 둘이 같이 걸려서 다행이네."
아이엄마라서 가지게 되는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격리기간에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남편 역시 코로나에 걸린 후 하루 정도만 38도의 고열에 시달린 후 말짱해졌지만, 남편과 놀아줄 사람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나뿐이었다. 남편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수시로 밥을 달라고 졸랐고, 밥을 주면 몇 숟가락 먹고 다 먹었으니 밥을 치우라고 한다. 그리고 5분이 지나고 나면 앞선 식사는 다 잊어버리고 뭔가를 먹겠다며 냉장고를 뒤진다. 그래서 아까 먹다 만 밥을 다시 꺼내어 주면 맛있게 먹겠다고 감사인사를 하며 몇 숟가락을 떴다가 또 배가 부르다며 일어나길 몇 번을 반복한다. 이러다간 식탁이 닳아 없어질 지도 모른다. 일반 부부들이 격리된 채 즐겁게 놀아도 괴로울 마당에 환자부부가 코로나에 갇혀 일주일 동안 북작거리고 있자니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아아...차라리 코로나에 걸리는게 낫지 않을까.
"저...코로나 해제가 되었는데 방사선 받으러 가도 되나요?"
-삼,사,오,육.... 오늘 오시면 되겠네요~! 오세요.
꾸역꾸역 참고 참기를 몇날 몇일. 코로나의 격리해제 날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에 전화를 했고, 간호사의 반가운 허락을 받은 즉시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다. 격리기간동안 통제가 더욱 어려웠던 남편은 집에 두고 열쇠로 잠구고 나왔다. 치매환자가 배회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달아둔 자물쇠다. 열쇠로만 열고 닫을 수 있게 설치해 두었는데, 처음에는 마음 아파하며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결국은 사용할 날이 찾아오게 되었다. 기껏 해봤자 왕복 두 시간.
”금새 다녀오면 되겠지?“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8일간의 감금 아닌 감금에서 풀려나 자유를 부여받은 나는 해방감을 고속도로에 흝뿌리며 병원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방사선을 받고 돌아온 집은 남편이 까먹은 귤의 껍질과 과자 봉지들로 초토화 되어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6회의 방사선은 끝이 났다. 그동안 남편을 데리고 방사선을 다니기도 했고, 많이 버거울 땐 집에 두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은 방치되었다. 내가 신경을 많이 못 써줘서 시위하는건지, 뇌에 이상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밤이 되면 섬망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새벽에 베란다를 향해 짐승처럼 하울링을 하기도 했다. 갑자기 대변을 못 가리고 소변을 지렸다. 시도 때도 없이 갈증에 시달렸고, 계속 무언가를 먹으려고 했다. 눈을 뜨면 죽은 가족들이 보인다고 하며 가족들이 언제 오냐고 물어 왔고, 대답을 해줘도 알아듣지 못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고 나에게 언어보다 욕을 더 많이 사용했다. 혈압도 정상이고 체온도 정상인데... 뭔가 뇌에 문제가 생긴 것만 같다.
이틀 뒤에 남편의 절단된 손가락 끝을 괴롭히는 신경종 제거 수술을 하니 그때 뇌 CT를 찍어봐 달라고 해야할 것 같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코로나 검사를 하기 위해 보건소에 갔는데 남편과 나를 보자마자 보건소 직원들은 분주하게 준비를 한다. 그동안의 방문으로 ‘협조가 잘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리라. 남편의 덩치에 비례하는 건장한 직원 네 명이 부스에서 나온다.
남편을 간이 의자에 앉히고 한 사람은 남편의 머리, 한 사람은 왼쪽 팔, 한 사람은 오른 팔, 한 사람은 PCR 검사. 나는 다리를 잡는다. 이는 한 번에 코를 찌르기 위함이다. 남편은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러대었고, 눈 깜짝할 새 검사가 끝났으며 고개를 연신 숙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검사하는 직원도 힘들고, 검사받는 남편도 힘들다. 대체 이 코로나는 언제 끝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