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첫 외래를 가는 날. 집에서 짱박혀 있는 간병녀에게 외출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피하지 않다.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 딸과 인지장애가 있는 남편을 덤으로 데리고 가야했기 때문이다.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늘 그래왔던 일이니 든든히 밥도 먹고, 마음도 먹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기다림의 연속인 외래진료의 특성상 남편과 딸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마, 배고파.”
“엄마, 심심해.”
“엄마, 화장실 어딨노.”
인지장애가 있는 남편도, 딸도 나를 엄마라 부른다. 남편의 사고가 있기 전, 우리는 아이를 세명정도 낳기로 했었는데, 둘이서 엄마, 엄마 하며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 있자노니 하나만 낳길 천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둘이서 콜라보로 내지르는 떼는 고막에 피가 날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내겐 그 둘을 곁에 머물게 하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둘의 떼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회피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은 나는, 교수가 이름을 부르기만을 간절히 기다렸고, 1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진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술은 잘 되었고, 막상 열어보니 크기가 커서 생각보다 더 많이 도려냈어요. 2.5cm정도 됩니다. 그리고 임파선 색이 좀 변했는데 떼어내는 것 보다는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두었어요."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임파선의 색이 변했다는 것은 전이가 있다는 말이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0기라고, 1cm도 안되는 작은애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2.5cm가 된 걸까. 임파선으로는 왜 전이가 된 걸까. 젊은 사람들은 병증의 진행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그게 이렇게나 빠른 것이었던가. 수술만 하면 똑 하고 떨어질 줄 알았는데 내 생각대로 끝나는 게 아니었던 건가.
유방암에는 크게 4가지의 분류법이 있다. 호르몬양성, 허투양성, 삼중양성, 삼중음성이 있는데, 나는 일반적인 암이라는 호르몬 양성이긴 하지만 암이 공격적인 편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표준치료에 들어갈 거예요. 호르몬을 먹고 사는 암이라서 주사와 먹는약으로 호르몬치료를 할 거고, 4회의 항암치료와 16회의 방사선치료를 할 겁니다. 음....항암 하실거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의 말을 덥썩 물었다.
"항암 안해도 되는거예요?"
"선택은 할 수 있는데 젊어서 하는 편이 좋아요."
"항암 안 하고 싶어요."
“왜요? 그래도 하는 게 예후에 더 좋을 것 같은데요.”
“...항암을 하면 남편 간병을 못할 것 같아서요...”
내 아버지와 남동생은 암환자였다.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그 둘의 추억은 역한 항암약의 냄새로 시작된다. 항암을 그렇게 하다가 하늘나라로 소풍을 떠났다. 그래서 나는 항암을 하는 것부터 거부감이 들었고, 항암을 하면 약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항암을 하면 내 남편은 대체 누가 간병한단 말인가. 내 딸은 누가 봐준단 말인가. 남편이 사고가 났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내가 수술한 후 팔 한쪽 움직이지 못하는 것 만으로도 일상이 풍비박산 나버렸다. 알 수 없는 결과를 가지고 지레 겁을 먹는 게 아니라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끝끝내 못이기는 척 방사선은 받겠다고 확답했다. 의사의 처방을 거부하면 그나마 확인을 위해 필요한 검사마저 못 하게 될 수 있다. 하나라도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내쉬는 한숨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입김은 내가 살아있다는 표시를 내며 공중에서 흩어졌다.
아직 살아있으니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말자.
슬퍼해봤자 울어봤자 알아줄 사람도 위로해줄 사람도 없고 시간 낭비일 뿐이니, 그저 항암을 하지 않겠다는 딜을 성공시켰다는 즐거움만 가지기로 했다.
나는 방사선을 받기 전까지, 어떻게든 몸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올라가지 않는 팔을 어떻게든 올라가게 하기 위한 스트레칭을 매일같이 해댔고, 남편을 간병하다보니 억지로라도 몸을 더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한달 만에 내 팔은 80%의 가동률을 보였고 얼핏 보면 수술한 사람 같지 않은 혈색을 자랑했다. 수술 후 회복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재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항암을 건너뛰고 선택한 방사선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사선실의 간호사들은 다들 지나치게 친절했다. 그것도 그럴 게 수술 후, 혹은 항암 후 지친몸을 이끌고 오는 곳이 대개 방사선실인 듯 했고, 그래서 그런지 다들 환자의 컨디션을 신경 썼다. 방사선 전, 방사선과 의사와 진료를 보는데, 내 차트를 보던 의사가 한마디 꺼냈다.
"항암은 왜 안해요?"
이렇게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남편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읍소를 하는 걸 보면 내가 상당히 활발할 것이라 생각들 하시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INTJ의 성격을 가진 내향인이라 내 이야기를 말로 잘 하지 못한다. 의사의 말에 우물쭈물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그렇게 됐어요."
"아이고 그렇게 되면 안 되죠. 방사선은 예방만 하는 거지 암을 없앨 수는 없는데."
"일단 방사선만 하기로 했어요."
그냥 이러쿵 저러쿵 설명을 하고 싶지 않다. 설명을 하려면 남편 이야기를 꺼내야 하고, 내가 항암을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내 아픈 이야기를 꺼내서 내 감정을 들추어내야 하는데 나의 감정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방사선은 총 16회를 합니다. 열을 이용해서 세포를 태우는 느낌이라 보면 되는데, 그냥 누워있으면 금방 끝나요. 아무 느낌 없을 수 있는데 그래도 이게 몸에 무리가 되는 거라 좀 피곤할 수 있으니 신체활동을 자제하고 영양 섭취 잘하시고요. 그리고 몸에 좋다는 거 아무거나 먹지 말고 그냥 밥 잘 먹고, 또 그렇다고 운동 너무 안 하지 말고 산책 잘하면서 기분전환도 하시고. 그러세요."
그렇게 방사선에 대한 일종의 설명을 듣고 가이드 선을 그려야 하니 다른 건물로 이동하라고 안내받았다. 북적이는 방사선실보다 사람 수가 훨씬 적은 가이드 선을 그리는 건물은 고요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쭈뼛거리며 입구에 서 있자 환자복을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고, 옷을 갈아입고 안내되는 방에 들어가니 갈아입은 보람도 없이 상의를 완전 탈의하고 CT처럼 생긴 기계에 누우라고 한다. 쭈뼛쭈뼛 누워 만세를 하니 긴장감에 심장이 요동을 친다.
”환자분, 숨을 얕게 쉬세요.“
이 가이드선은 앞으로 내가 받게 될 방사선의 위치를 정하는 가이드 선으로, 같은 곳에 방사선을 조사하기 위한 중요한 선이다. 그래서 숨을 쉬기 위해 몸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마저 그들의 업무에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움직이지 말라는 말만 몇 번씩 반복해대는데, 얼마나 움직이지 마라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수술한 가슴을 복원한다고 했지만, 두 가슴의 위치가 바르지 않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부터 수치스럽다.
”스캔은 끝났구요, 이제 가이드 선을 그릴 거니까 그대로 계세요.“
내 알몸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의 젊은 의사들이 들어온다. 검은 잉크와 긴 막대를 가지고 내 몸에 찍어가며 뭔가를 그려댄다. 알싸한 잉크 향기와 차가운 물기가 몸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놀랐다. 마치 도축되는 소가 된 기분이다.
‘이 시간만 참으면 된다... 이 시간만 참으면.’
일주일 뒤부터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에 방사선을 받으러 오면 되고, 그려놓은 선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씻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이드선은 상체의 80%를 덮은 상태라 그냥 상체를 씻는것을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호르몬의 억제를 위한 타목시펜을 복용한 이후로 시작된 갱년기증상 때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씻지 않아도 선이 지워져 버리는 불상사를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