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산재사고로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었다. 수술시 절단 부위의 끝은 신경을 묶어서 마무리했는데, 이 마무리한 부분은 끝없는 통증으로 남편을 괴롭혔고, 그러한 통증을 피하기 위해 남편은 모든 치료에 비협조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이러한 골칫덩이 신경종을 제거하고자 수술을 하기로 했고, 입원 전 미리 간병인을 고용해 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남편. 그러나 오늘도 으레 그렇듯 20년전 하늘로 떠나신 남편의 아빠가 오셨다며 헛소리를 한다.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환각과 환청 때문에 뇌 CT와 더불어 뇌파검사도 의뢰해 두었다. 더 늦기 전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내야 한다.
남편의 입원수속을 마치고 간병인에게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남편이 입원하는 일주일동안 간병업무는 휴식이다. 소홀했던 딸과 진득하게 휴가를 보낼 생각에 잠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방금 입원했는데 전화가 오는 것 보면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게 있었던 모양이다.
"네. 보호자입니다."
-배우자분이시죠. 000씨께서 수술이 안되실 것 같아요.
"네? 왜요?"
-당 수치가 측정 불가로 뜹니다. 너무 고혈당이세요. 이렇게 혈당이 높으면 수술이 안돼요. 당장 퇴원하셔야 합니다.
"네? 뭐 때문에요?"
혈당이 갑자기? 혈당이? 생각지도 못한 혈당.
50분의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갔다. 고용했던 간병인은 코로나검사까지 하고 병원에 들어왔는데 간병을 못하게 되었으니 보상해달라고 툴툴거렸다. 남편의 혈당문제가 내 탓이 되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의사가 급하게 달려와 말했다.
"혈당기계에 측정불가로 뜹니다. 혈당이 많이 높다는 말이예요. 긴급인슐린을 투여했는데 그래도 600이 나옵니다. 이러면 수술이 안돼요. 오늘 퇴원조치하고, 내일자로 내분비내과에 협진해 두었으니 외래를 빨리 가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오늘따라 얼굴이 검게 웃는 남편을 보며 자책했다. 그동안 남편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게 혈당이 좋지 않아서였던건가.
그것도 모르고 달라는 거 다 줬다니...
그동안 혈당 체크를 해볼 생각을 왜 못했을까.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나마 아는 사람은 나인데.
내가 저 사람을 죽게 놔둘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저 사람을 방치해둔 것 만으로도 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었겠구나.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심장이 뛰었다.
내가 남편을 그냥 둔 것만으로도 죽인 것이 되었다.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남편을 덥썩 안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그렇게 죄인이 되었다.
다음날, 예약해 둔 내분비내과로 향했다. 남편의 이력을 본 교수는 난감해한다. 만기신부전에 당뇨까지 온 어려운 환자인데 거기에다 자신의 병을 인지할 수 없어 배우자가 관리해야 하는 환자라니.
신장식과 당뇨식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식이문제가 가장 어려운 환자에 속한다. 당뇨식을 먹으면 신장이 나빠지고, 신장식을 먹으면 혈당이 요동친다. 그동안 내가 신장식을 해서 당뇨가 생긴걸까.
어제의 혈당수치인 600보다는 조금 떨어져 500이라는 수치로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말도 안되는 고혈당이다. 이제는 완전히 당뇨환자가 되었으니 국가에 당뇨환자로 등록하여 소모성 재료 신청도 하고, 찐 당뇨환자로서 관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제가 신부전에 대해 교육을 들은적은 있었는데, 당뇨는 아무것도 몰라서요. 혹시 당뇨 교육도 있나요?"
교수는 인슐린을 처방해주게 될 약재부에 오더를 내려 주었고 인슐린의 종류와 관리법, 그리고 당뇨식에 대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뇌, 신부전, 당뇨, 암.
이쯤 되면 의사시험을 쳐도 될만한 수준의 의학지식을 겸비한 것이 아닌가. 가정의학과 정도로 개원하면 불티나게 바쁠 것 같긴 한데, 바쁜걸로 따지자면 의사보다 뇌병변 산재환자를 관리하고 있는 암환자인 내가 더 바쁜 것 같다.
다행히 인슐린을 맞으니 혈당수치가 뚝뚝 떨어진다. 당뇨를 잘 아는 지인은 인슐린이 잘 들어서 다행이라고 하며 인슐린을 맞아도 조절이 안되는 환자들이 있다고 첨언을 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당뇨. 혈액의 상태가 좋지 못해 말초혈관까지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게 되면 심장에서 가장 먼 손, 발부터 서서히 썩어들어간다. 그리고는 회복이 되지 않아 절단에 까지 이른다는 당뇨. 어떤 환자는 사지를 자르고 몸만 남아도 숨을 쉬고 산다고 했다. 가뜩이나 겨우 건진 남편의 실낱같은 목숨. 또다시 그 길로 내몰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더 남편을 위해 뛰리라 다짐했다.
냉장고에 잠금장치를 달았다. 열쇠로 잠그는 방식은 번거로워보여 나도 열기 편할 수 있게 비밀번호 형식으로 구매해 달았다. 어차피 남편은 비밀번호를 알려줘도 기억하지 못한다. 남편은 평소와 같이 냉장고를 열었는데 어딘가에 걸려 열리지 않는 냉장고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거 왜 안열리노?”
“이제 아무거나 막 먹으면 큰일 나. 당뇨가 걸려서 그래. 이제 간식 줄이고 조심하려고 잠궈뒀어.”
남편은 인지가 많이 떨어진다. 내가 설명해 주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지 못하면 일단 기분부터 나빠진다. 이내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길래 재차 설명해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야이 시발년아. 문 열으라고!!!”
남편이 냉장고를 뜯을 기세로 열어젖힌다. 잠금장치를 살 때 왠만해서는 떨어지지 않으니 심사숙고해서 설치하라고 상세페이지에 적혀져 있었고, 정말로 붙이고나니 떨어지지 않아 안심했다. 그러나 90KG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남편에게는 종이짝처럼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뜯겨버렸다. 남편은 덜렁거리는 잠금장치를 제치고 냉장고 안을 뒤지다 우유를 꺼내 반 통을 다 비워 마신 후에야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냉장고가 뜯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잠금장치를 재구매하기 위해 쇼핑몰의 앱을 열었다.
한달 뒤, 남편의 혈당수치 때문에 미뤄진 손가락 신경종 제거 수술과 이젠 필요없어진 복막투석관을 제거 하기 위해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물론 모두를 힘들게 하는 코로나 검사도 또 했다.
남편은 말기 신부전증에서 만기신부전 4기까지 개미똥꾸멍만큼 좋아졌다. 남편의 신부전증은 일반적인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고 후 패혈증을 막기 위한 항생제와 뇌부종을 막기 위한 만니톨을 때려부은 결과로서의 신부전증이였다. 그때는 사망할 것을 각오하고 모든 의료처치를 했던거라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서 약물을 투여했고, 그것을 기적적으로 뚫고 살아난 남편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신장이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견뎌준 남편에게 나름의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내 몸을 갈아서 간병하고, 신장식을 시행했으며, 복막투석까지 시켜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조금씩 좋아져 투석을 하지 않아도 수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나의 불가피하고 괴로운 상황을 잘 아는 의사는 투석보다 삶에 집중하라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인지가 떨어지는 남편에게 신장이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남편에게 신장을 줄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복막투석관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시 투석할때에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기정사실을 결심한 채 행하는 큰 결정이다.
이번에는 남편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간병인이 아닌, 내가 간병을 하러 병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딸은 친정엄마께 연차를 써주시길 간청하여 맡겨두었다.
입원한 당일 저녁은 이것저것 수술 전 검사를 하러 병원을 돌아다녔고, 금식이었지만 이내 잊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남편을 피해 멀리 도망가 있기를 몇 번씩 반복하니 새벽이 찾아왔다. 남편을 수술실로 보내며 몇 번째 반복되는 데자뷰같은 이 장면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길 바랬다. 이번 수술이 제발 마지막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수술만이 내 역경의 전부가 아니다.
남편과 나는 같은 대학병원을 다닌다. 그러다 보니 진료날짜가 겹칠때가 종종 발생했고, 어느날은 이런 진료스케쥴이 잡혔다. 1) 남편의 손가락 수술 후 남겨진 실밥을 뽑으러 정형외과를 가야하고, 2) 복막투석관을 제거한 곳의 상태를 보기 위해 외과를 가야 하며, 3) 나의 호르몬 차단 주사를 맞기 위해 유방외과에 가야 한다.
남편은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어디로 가냐고 스무번은 더 물었다. 나는 병원에 간다고 앵무새처럼 대답해주었다. 언제까지 끝나지 않는 이 질문은 계속되는 걸까. 이렇게까지 매일같이 이야기를 해주고, 한달에 다섯번은 더 왕복하는 대학병원 가는길을 3년이 넘도록 모르겠다고 말하는 현실. 몇 년이 지나도 도저히 믿겨 지지 않는 사실이다.
외과에서는 녹는실을 썼다. 그래서 잘 관리를 하라고 한 후 진료가 종료되었다. 그런데 정형외과에서는 일반실을 썼다. 일반실은 실밥을 뽑아주어야 한다. '대체 교수님은 왜 그러셨을까' 하며 영혼없는 원망을 해본다. 수술은 같은날에 이루어졌는데 말이다.
남편은 끝도 없는 통증에 겁을 집어먹어 절단된 손을 내밀지도 못했고, 당연히 실밥을 뽑지 못한 채 의료진과 마주 앉아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30분이 지났을까. 분위기 환기라도 시킬 요량으로 내 진료를 먼저 받으러 유방외과로 갔다. 아주 뻐근한 느낌을 가진 루프린 주사를 맞고 팔을 부여잡은 채 다시 남편을 끌고 정형외과로 갔다. 그러나, 병원 진료마감시간이 다 되도록 남편은 끝끝내 실밥을 뽑지 못했고, 나는 실밥을 뽑기 위한 전신마취수술을 또 결심해야했다.
처음부터 녹는실을 써달라고 요구했다면 좋았을텐데. 남편의 현실을 잘 아는 사람은 나인데.
간병녀는.
선택된 그날부터 죄인이라는 죄명을 뒤집어 쓰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