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근처에 우수아이아에서 백 년이 된 카페가 있다기에 찾아왔다. 오래된 냄새가 물씬 난다. 편안하다.
초콜릿차 '수브마리노'를 마시며 찬찬히 여행을 생각하며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 여행은 온전히 '자연과 대륙'에 맞춰있다. '자연과 나'의 구도이다.
함께 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전문 여행사에서 모집하는 일정이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되는 여행이라 모르는 사람들과 친밀해야 하거나 특별히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여서일 게다.
21명의 일행 중 나이가 주로 60대이고, 70대인 부부도 있고, 은퇴를 한 부부가 많다.
여행 베테랑들도 있고 여행을 좀 다녔다는 사람들이 더 늦기 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온 분들이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 다닌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적당한 거리감을 갖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이 사람들처럼 더 멀리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나이를 느끼며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한편에는 아쉬움을 가지고 다니게 될까? 우리는 여행을 통해 성숙해지거나 여유 있어지거나 자연스러운 사람이 돼가고 있는가? 시간, 돈, 노력 이런 것들을 가치 있는 곳에 쓰고 있는 거 맞나?"
이런 생각들과 함께,
개인적으로는 미안함이 많다. 이렇게 여행 다니는 나를 부러워하는 것은 좀 불편하다. 좋은 모델이나 조언자 정도의 도움이 되었음 좋겠다.
'너의 경험이나 경륜이 나에게 도움이 되듯이 나의 그런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였음 좋겠다. 부러움을 주거나 자랑질의 종류가 아니었음 좋겠다.
페북에 보고를 올리거나, 여행기를 쓰면서 고심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Al Almacen de Ramos General카페에서
도시의 명예를 위하여
아직 도시가 크게 매력적으로 와닿지는 않으나 아르헨티나의 도시에 왔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들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도 좋다. '좋은 공기'라는 뜻이란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여행 내내 가이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 계속 신신당부를 했는데, 페루 칠레에는 없었다. 오히려 두 나라 사람들은 선량하다는 느낌이었고.
아르헨티나 특히 이 도시에 들어올 때 또 신신당부를 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나라들이 문제일까?
최소한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곳엔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도 치안유지에 신경을 쓰면 좋겠네.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는 책자에 '소매치기 조심'이라는 경구가 빠짐없이 있고, 가이드들이 수도 없이 '소매치기 조심'을 강조한다는 것은 좀 불명예스럽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70~80년대까지는 소매치기가 많았다고 기억하는데, 급격한 도시화와 경제적인 불평등에서 오는 현상이겠지만, 최소한 내가 여행한 나라에는 관심과 애정이 급증하는 편이라 빨리 이들 나라가 오명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 격세지감이로다.
저녁은 가이드가 쏜단다. 소고기 양고기 그릴인 '아사도'로.
'여행에선 먹는 것이 반'이라며 음식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 걸 안다. 이렇게 단체로 식사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지만 착한 가이드가 쏜다고 하니 또 가야지. 고기가 엄청 많이 나온다. 그런데 먹지 않는 고기가 많다. 스테이크 한 조각이면 만족할 텐데. 와인이 곁들여서 그나마 패스. 몹시 곤하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다. 미터기로 계산한다. 다행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훑어보기
아침부터 밤까지 딱 하루의 시간에 이 도시를 훑어야 한다. 도시는 크다. 개인적으로 여행할지, 모두 함께 20달러를 지불하고 차와 함께 시내투어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넓고, 덥고, 소매치기 어쩌구, 치안문제 어쩌구... 그냥 편하게 묻어가는 것으로 한다.
보카지구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상가로, 벽화마을로 변신했으나 빈민촌이었던 곳이다.
가게 문들이 막 열리고 있고 색색의 페인트로 그린 그림과 유명 인사들의 모형들, 마네킹들이 전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햇살이 강렬하다. 그림들의 색깔이 선명해서 햇살과 함께 사진이 잘 나온다.
곳곳에 경찰들이 나와 있다. 안전 최고~
엘아테네오 서점
이런 수식어가 가능할까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름이 붙은, 오페라극장을 서점으로 개조한 곳이다. 이 도시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여기 서점이었다. 무대였던 곳에서 차 한 잔 하는 그림을 상상했다. 그렇게 했다.
둥글고 우아한 서점 앞 무대자리에 앉아 수브마리노와 커피를 주문한다. 뭐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많지도 않았으나 그 순간이 그 기분이 좋다. 서점을 둘러보고 베레모를 쓴 아련한 모습의 체게바라 엽서만 하나 사서 나온다. 우리나라도 오페라 극장 같은 곳을 그렇게 서점으로 개조하면 당근 멋있을 것이다.
레콜레타 지구의 무덤
무덤도 관광지가 된다. 건축과 조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무덤들이다. 특히 88번 에비타의 무덤을 보러 간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너무 사랑했다는 퍼스트레이디 에바페론, 여행서에서 봤던 것처럼 지금도 장미와 함께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시민들도 있고 관광객도 있고. 여기저기 무덤을 사진 찍다.
죽어서도 이렇게 장식하고 싶었을까. 본인들은 모르지. 가족들의 바람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르지 않은 권위와 권세의 모습들.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 좋을까? 의미는 있을까?
일행 중 한 분은 무슨 무덤을 관광하냐고 언짢아하신다. ㅋ. 관광이 그렇지요. 유명한 곳을 찾는 것이 관광이잖아요, 그것이 무덤이든, 관이든....
5월 광장
대성당. 산마르틴의 묘를 의미 있게 보다. 군인 둘이 경건하게 지키고 있다.
까사로다. 분홍색 집인 대통령궁, 거기 발코니에서 에비타가 연설했다는, 미리 인터넷예약하면 들어갈 수 있다는 일요일. 우리는 그냥 밖에서 뜨거운 햇살 아래 훑어보는 것으로 끝. 대신 옆에 아르헨티나의 근대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이 현대식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대통령들... 에비타와 페론 앞에서 한 컷. 내가 왜 그녀를 가까이 느끼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성장과정, 그리고 빈민들을 위한 정책에 마음이 간 듯.
다시 대성당으로 들어가 볕을 피하고 통째로 간 오렌지 주스를 사서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 차 안으로 들어오다. 이미 차 안에는 일찌감치 구경을 끝낸 일행이 지쳐 앉아있다. 도시 구경은 정말 쉽지 않다.
저녁에 탱고쇼를 보다.
말로만 듣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으면 꼭 봐야 할 것 같은 쇼쇼쇼.
식사는 하지 않고 쇼만 보는데 10만 원 정도다.
허술한 건물의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니 생각지 못한 넓고 훌륭한 극장이 나타난다.
연주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반도네온’ 아코디언 이런 악기로 구성된 작은 규모인데 그 소리가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