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을 짤 때 그 나라의 숫자나 인사말, 쇼핑할 때 사용할 말 등을 외우는 게 재밌다. 필요하기도 하고.
방콕으로
캄보디아 가기 전날 방콕에서 하루 잤다고 다시 오니 집에 온 듯 익숙하다.
오늘 하루는 방콕 시내를 돌기로 한다. 불교국가답게 가볼 만한 곳으로 절이 많다.
'와트프라캐오'는 본 사원에 있는 부처의 얼굴이 에메랄드빛이어서 에메랄드 사원이라 한다고. 사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위용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유명한 큰 절들, 불국사나 송광사 화엄사 이런 절을 떠올린다. 규모로는 중국의 절이나 여기 불교국가의 절과는 비교가 안 되겠다. 오히려 우리의 절들이, 특히나 내 좋아하는 산속의 작은 절들이 얼마나 단아하고 품위 있고 고적한지 알겠다. 다들 자기 나라의 절을 그렇게 생각하려나?
'와트포'에는 거대한 와불이 있다. 46미터나 된다는 기다란 몸길이와 발바닥의 섬세한 조각이라니...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담고 유유자적하게 누워있는 폼이, 평생 앉아 있는 부처님들보다 편안해 보이지 않는가.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참으로 도를 깨친 스님이 아니었을까 싶다.
절마당에 있는 탑은 갖가지 꽃 장식으로 몹시 화려하다. 역시 전혀 색깔을 입히지 않고 돌의 흔적만 고고히 남은 우리의 탑과는 많이 다르다.
좀 만만하게 봤던가? 태국 만만하게 볼 나라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많은 관광객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다. 물가 싸고 볼거리, 놀 거리가 많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고 알려진 이유가 있다. 역사와 국토의 크기와도 관련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도 우리만의 특색 있는 관광 상품이 있어야 하는데, 뭐가 있더라...
'와트아룬'으로 가기 위해 왕궁에서 차오프라야강을 건넌다. 배 타고 1분 갔나? 뱃삯이 3밧이니 우리 돈으로 90원. 되게 소박하네. 할머니 한 분이 받고 있다. 용돈으로 쓰시나? 했더니 웬걸, 잠시 눈여겨보니 그 사이 엄청 많은 사람들이 쉼 없이 왕복하는 이 배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
와트아룬은 새벽에 보면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밝고 더운 대낮에 보니까 그런 건지, 앞의 두 사원을 보고 나니까 그런 건지 별 생각이 없다. 이것도 보통 절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현대의 거리, 배낭족들의 거리, 카오산로드로 돌아와서 발마사지를 받는다. 30분 동안 100밧. 난 3000원으로 여행의 피로를 씻는다. 여행사 ‘홍익인간’에서 저녁을 먹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아이들은 신라면을 국물도 남김없이 먹는다.
오늘 밤은 버스에서 잔다. 꼬사무이 섬을 가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타는 거다. 7시가 넘어 차는 출발하고 우리가 잠든 사이에 내일 아침 6시경에 수라타니라는 도시에 우리를 내려놓을 것이다. 거기서 배를 타고 꼬사무이 섬으로 들어간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꼬사무이 섬
유명한 관광지인 푸껫이나 파타야 말고 없을까?
코사무이 섬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을 찾다 알게 된 섬이다. 처음 듣는 섬이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처음 떠나는 자유여행에서 아이들과 야간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을 하다니.
아침 5시 30분에 차가 멈추고 우리는 내린다.
버스 안에서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고개가 사방으로 떨어지고 허리는 붕 뜨고 다리는 꼬아져 펴지도 못하고.. 못 견디겠더니만 그래도 차에서 내리니 몸이 제대로 펴지기는 한다. 아이들은 늘어지게 잔 모양이다. 역시 말랑말랑한 아이들!
싱가포르에서 어학연수 중인 우리나라 대학생 한 명이 같은 차를 타고 왔다. 혼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중인데 차를 갈아타고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더 가야 한단다. 난 학교에 가면 이 젊은이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해주겠다고 마음에 저장해 놓는다. 그 녀석이 무지 자유롭게 보였고 젊은이다웠기에. 얘들아 부디 그렇게 여행 다니거라~ 이런 주제일 게다.
또 버스를 타야 한단다. 내린 곳에서 두 시간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40분 정도 달린다. 돈사크 항에 도착하고 거기서 코사무이섬으로 가는 배를 탄다. 10시에 출발하여 2시간인가 3시간 배를 탔을까? 드디어 코사무이섬의 나톤 항구에 도착하다.
우리 너무 멀리 온 거 아님? 어찌 이렇게 구석에 있는 섬을? 얼마나 아름답길래 어린것들을 끌고 여기까지? 열심히 정보를 찾고 애쓴 그에게 말은 못 하고, 몸이 참으로 곤하다.
미니버스를 타고 예약한 숙소로 또 달리다. 차웽비치에 있는 방갈로란다. 오, 바닷가를 앞에 두고 차웽비치는 매우 흥성거리고 있더라. 서양인에게는 많이 알려진 곳인 듯한데 한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루 종일 바닷가 거닐고 먹고 쇼핑하고.. 아들 녀석은 물에 들어가 신나게 놀고 그새 몸이 새까매졌다. 바닷바람이 많이 부는 편이다. 오늘은 딸아이 생일이다. 저녁에 뷔페로 시푸드를 먹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시푸드'이다.
완전한 휴식의 시간이다.
아침에 거닐면서 보니 주변에 고급스러운 리조트들이 많다. 주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리조트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도 저런 리조트에 묵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지금 우리의 자그마한 방갈로도 호사이고, 이 여행도 호사이고, 아무런 불편함 없고 걱정 없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는데 무슨 욕심?' 반성한다.
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아침에 바닷가 한번 거닐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본다.
눈이 부시다. 바람과 파도와 새들은 경계를 넘나들며 지들끼리 노니나 보다.
언제 또 이 섬을 찾게 될까?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바닷가, 이국적이면서도 우리나라 시골 느낌도 나는 잔잔한 섬이다.
야자수나무 아래 온몸을 드러낸 서양인들, 어슬렁 기어다는 점잖은 개들, 너무 모래 같은 흰모래들, 쉼 없는 파도와 바람들....
아이들이 시킨 핫쵸코가 나온다. 설탕까지 곁들여서.
안 그래도 달 텐데 아이가 설탕을 또 넣으려 한다.
“ 아저씨 하는 말 못 들었어? ‘너 미쳤니, 설탕 더 넣어먹을 거야?’ 하잖아.”
아이들은 무료할 때 단 게 땡기는 걸까?
이제 이곳 방갈로를 떠날 시간. 짐을 챙겨가지고 나와야 한다.
12시. 미니버스로 방갈로 출발. 그리고 나톤항 도착. 페리 탑승, 수라타니 도착, 6시 30분 방콕으로 가는 야간 버스 탑승.... 꼬사무이 섬에 올 때와 반대로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다.
방콕 돌기
아침 5시 30분에 카오산로드에 떨어지다.
숙소로 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시암월드트레이드센터로 가서 태국식 아침을 사 먹고 차도 한 잔 하고 백화점도 구경한다.
그러나 오늘 진짜 갈 곳은 짜투짝 시장! 엄청난 규모의 주말시장이라 하고 아이들이 기대하는 곳이다.
고가전철(BTS) 타고 도착한 곳엔 사람도 무지 많고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같이 온갖 것을 파는 곳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 아이들이 이것저것을 고른다. 아들 녀석은 멋진 시계를 사고 신나 하더니 뒷면을 보니 '메이드인차이나' 입꼬리가 내려간다.
너무 덥다. 얼른 숙소로 돌아 가자. 엄마는 확실히 쇼핑 체질이 아니야. 조금만 돌아다녀도 바로 피곤하다. 걷거나 산에 오르는 것은 아무리 길게 해도 지치지 않는데 말이다. 안 그래도 오늘 일정은 곤한 일정이다. 야간 버스에, 아침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시장이라니.....
숙소엔 수영장이 있다. 아이들이 수영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역시 신난다.
이제 내일 투어만 남았다. 그리곤 서울로 간다. 집에 가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이들도 그도 나도.
칸차나부리 투어
태국의 마지막 날이다. 여기는 투어가 잘 되어 있다니 '칸차나부리' 투어에 참여하기로 한다. 약 10명이 같이 움직이는데 미니버스로 2시간여 달려간 곳은 2차 대전 때 참여했던 연합군들의 묘지다. 묘석에 쓰여 있는 글을 보니, 전쟁의 상흔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비극이며, '인간이 저지른 가장 어리석고 참혹한 죄악'으로 남는다는 것, 새삼 깨친다.
뗏목을 타고 '콰이강의 다리' 밑을 지나가는 순서.
우리가 탄 뗏목은 태국인과 일본인이 같은 팀, 태국인 사공이 일본 청년에게 노를 젓게 한다. 처음엔 화이또를 외치며 땡볕 아래서 무지 신나게 노를 젓더니 얼마 못 가 힘들어하고 지쳐한다.
나중에 전쟁기념관에 가보니 일본군이 이 콰이강의 다리를 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태국인들을 괴롭혔는지가 전시되어 있다. 아마 태국 사공이 그걸 염두에 두고 그랬을까? 너네 조상들의 죗값을 조금이라도 치러보라고... 도대체 일본 놈들은 그 조그만 섬나라에서 어떻게 여기 먼 곳까지 와서 전쟁을 치렀을까.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불편한 관계만 알았던 나는 여기 태국에서 일본이란 나라에 놀라고 있다. 이웃나라에 너무 많은 고통을 주었다는 것....
타킬렌역(THAKILEN)에서 남토크역까지 가는 기차를 탄다. 태국에서 미얀마국경으로 가는 기차이다. 1시간 정도 달리는데 무수한 정글을 지나고 강도 지나간다. 열려 있는 모든 창문 사이로 남국의 바람은 사정없이 들어오고 햇살도 쏟아져 들어온다. 가만 보니 우리가 탄 칸은 거의가 외국인이다. '관광객이 많아서 정말 좋겠다' 또 한 번 부러워해주고.
남토크역에 도착하여 준비된 태국식 덮밥을 먹다. 야외에서 먹는 맛이 괜찮다.
차를 타고 무슨 폭포도 갔다 오고 그리고 코끼리 트레킹.
무섭지 않을까? 코끼리 등 위에 의자를 놓고 사람이 둘씩이나 앉는데 너무 무겁지 않을까?
걱정도 잠시, 숲을 지나다가 낮은 언덕 같은 곳을 어슬렁거리며 오를 때는 떨어질 것 같이 출렁거리기도 하는 게 재밌다. 20분 정도 그렇게 가는데 중간 한적한 곳에서 아저찌가 팁을 달란다. 톤레삽에서도 호수 한가운데 세워놓고 팁을 요구하는 게 언짢고 싫기도 해서 그냥 돌아온 기억이 있는데, 팁은 다 구경하고 나서 기분 좋거나 고마우면 주는 거 아닌가? 지금 돈이 없다 하니 그러면 그냥 관두란다. 사람 없는 곳에서 몰래 받으시는 모양이다. 좀 야멸찼나... 이런 불편한 팁 문화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코끼리에게 고맙기는 한데...
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차를 타고 다시 카오산으로 돌아오다.
카오산로드는 명동처럼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차 없는 거리는 더욱 활기차고 자유롭다. 이것저것 기념품도 구경하고 아들 녀석은 친구 선물을 알뜰히 고른다. 기특하군.
돌아와 짐 정리 끝내고 맥주 한 잔 하다.
우리 기특하다. 아이들도 많이 컸네. 감사할 일이 많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2주일의 일정. 아이들과 처음 하는 자유여행이 이렇게 끝나간다.
한국으로
인천공항 도착. 아이들은 효자가 아니라 애국자가 된 듯하다. ‘나으 살던’도 부르고, '고국 땅을 오랜만에 밟는다'는 둥 너스레를 떤다. 짐도 금방 찾고 커다란 공항을 빠져나온다.
공항버스를 타고 나오는데 밖엔 눈이 온 흔적이 있다. 몹시 더운 나라에서 몹시 추운 나라로 왔다.
집으로 막 뛰어간다. 정말 춥다. 집이 보인다. 이렇게 신날 수가..
외출로 해놓고 간 보일러가 아예 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듯 방바닥이 냉골이다. 대충 짐 풀어놓고 라면을 끓인다. 우리 물로. 김치를 꺼낸다. 우리의 여행의 마무리가 이거다.
여행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은 사치스러운 고생이다. 고생스러운 사치인가?
여행은 나의 '일상에서 열심히 삶'과 같은 종류의 이름이다. 나는 이 여유로움과 고생과 일탈의 새로움을 사랑한다. 2004.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