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은 인천에서 베이징, 베이징에서 연길로(1박), 연길에서 백두산 천지 (2박), 연길에서 베이징으로(3박), 베이징에서 내몽고로 기차(4박), 내몽고에서(5박), 내몽고에서 베이징으로(6박), 베이징에서 인천으로.
가격은 어른 115만 원, 아이 95만 원, 우리 네 식구는 420만 원.
가벼운 첫 여행과 비교도 안 되는 거금이다. 흠, 일단 지른다!
연길로
베이징 공항에서 국내선 연길공항까지 수속 시간이 길다.
유명한 만만디의 시작이다. 3시간 정도 연착되고 있는데 아무런 안내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게 한다. 2월 첫 여행 때의 몇 경험이 떠오르며 한때 호감을 가졌던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하다. 그들이 깃발을 내거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잘 작동하고 있는 걸까? 여행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떠나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위압적인 공안의 존재나 무례하고 대책 없는 만만디 같은 정신을 대하는 나는 불쾌하고 성질이 나는데, 이것은 어떤 배신감과 맥이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념이든 휘날리는 깃발로 완성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밤 10시에 연길에 도착하다. 오고 싶었던 곳이다. 여기 사람들은 조선족이면서도 중국인이란 자부심이 강하다고 들었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 느끼며 감흥을 갖는 것은 우리의 감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별이 총총한 연길공항의 하늘을 보며 내 깊은 곳에서 복잡한 설렘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길이 그냥 연길이겠는가. 오래전 먼 이국땅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사연이 저 별들보다 적을까...
내일 백두산엘 간다. 날이 쾌청하여 천지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첫 밤을 보내다.
백두산 가는 길
7시 여관 출발, 연길 시내를 거쳐 백두산으로 향한다.
시내 간판에서 한글을 보니 반갑다. 조선족 자치주가 이런 건가 보다. 위쪽은 한글, 아래쪽은 한자, 혹은 왼쪽은 한글, 오른쪽은 한자 이런 식으로 쓰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단다.
자전거 출근길, 숫자로 되어있는 신호등이 흥미롭다. 차들은 좀 난폭하다. 간혹 신호도 무시하고 앞에 무엇이라도 나타나면 빵빵거리고 급한데, 그에 반해 지나가는 사람들은 비키든지 그냥 있든지 성질내지도 않고 만만디 표정이다. 2월에 본 중국과 다르지 않다. 여기도 중국 맞다.
나는 그들이 반가운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물다.
'너무 흔하게 보는 한국인 관광객인가? 돈이나 많이 쓰고 가면 좋은 그런 관광객에 불과한가?'
내내 날이 쾌청하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프차를 타고 천지 가까이 오른단다.
화산지형이라 흙길이 급경사이다. 저 위 200미터쯤 오르면 천지가 내려다 보인다고 하는데 이미 안개는 사방으로 진하게 퍼져 있다. 천지를 볼 수 있겠는가? 마음이 급해진다.
천지! 드디어 그 앞에 서다.
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 저쯤이라는데 여기가 천지인지 뭔지 증명할 아무것도 없다. 조그만 비석하나 서 있다. 한글로 ‘백두산 천지’, 그 옆에 한자로 ‘長白山 天池’. 이것으로 저 아래 천지가 있음을 감을 잡는 거다. 아이들이 아쉬워한다. 어른은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천지 기념 끝!
허무하여라.
진짜 천지를 보러 가자!
이대로 끝일 수는 없다. 아이들은 가이드와 함께 차로 장백폭포 쪽으로 내려 보내고 어른들은 백두산 가이드를 따라 천지 밑으로 직접 걸어 내려가기로 한다. 천지에서 밑으로 걸어내려가면 장백폭포로 가는 길이란다. 내려가는 길은 완전 급경사이다. 조심조심 내려가니 에델바이스가 아닐까, 이름을 모르는 키 작은 들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안개는 조금씩 옅어지거나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내려온 저 위쪽으로는 아직도 흐린데 아래 백두산의 산자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의 산과는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 아래 나타나는 저것!!! 그 넓고 푸른 가슴을 열고 묵묵히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저것! 천지!! 오마이!!! 함성이 터져 나온다.
한눈에 보이는 거룩한 광경을 대하며 우리는 조급해진다. 천지 가까이 가기 위해 여전히 급경사인 길을 내려간다.
천지는 한쪽으로 뚫려 있어 그 물이 흘러가 장백폭포를 만들고 송화강을 만들어 낸단다.
그 개천 같은 물을 건너가면 드디어 천지 앞에 닿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개천 앞에 사람 하나 서있다. 흐르는 물가에 나무 하나 걸쳐놓고 건너는 값을 요구하는 중국인이다.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흥! 우리는 신발을 벗어든다. 바지를 걷어 올린다. 물가로 들어간다. 차가운 기운이 가슴까지 저리게 한다.
우리 천지를 보는데 저들의 땅을 거쳐야 하고, 저놈들에게 이런저런 불편함을 받고 눈치도 봐야 하는 쓰라린 마음이 싸하니 저린다. 쌩하니 물을 건너온다. 저들은 쩝~ 하는 표정이다. 흥!!!
드디어 천지 앞에 서다. 사진에서 바닷물인 듯 봤던 그 천지가 내 눈앞에서 내 발 앞에서 찰랑거린다.
2천 미터가 넘는 산 위에 있는 이 거대한 호수는 넓이가 3km x 4km, 깊이 300m라 한다. 남쪽의 끝에 있는 한라산의 백록담, 북쪽의 끝에 있는 천지, 이 쌍둥이 같은 두 화산이 한반도를 아름답게 이어놓을 날이 언제가 될까. 손으로 한 움큼 떠서 물을 마신다. 또 한 움큼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시큰하고 시원하다.
북한 쪽의 장군봉 윗부분은 아직 안갯속이다. 그들은 쉽사리 제 몸을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천지의 주변에 쓰레기가 널려있다. 화장실도 있다.
우리에게는 영산인 백두산이 중국인에게는 그냥 하나의 산일뿐이다. 천지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거의 남쪽 사람들이라는데 예상은 했지만 불편한 일이 많다.
언제 여기를 다시 오게 될까? 우리 아이들도 이 천지를 같이 보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아이들과 통일이 되면 올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한다.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중국 쪽으로 말고 우리의 북녘 땅을 통해서 찾을 날이 멀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장백폭포 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이어져 있다. 저 아래로 관광객들이 보인다. 우리 아이들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을 통해서 천지를 쉽게 오를 수 있겠다 싶은데 조금 내려가니 길이 공사 중이다. 도로 밑으로는 낭떠러지가 있고 위험한 구간인데 별 안전장치도 없고 건축물에 철근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다. 저 아래에서 등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는 인부들의 모습이 힘겨워보이고 일 자체도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 한눈에 느껴진다.
저건 아니지... 인구가 너무 많아서인가? 사람의 생명이나 가치가 아니라, 넘쳐나는 노동력으로만 인지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앞서가는 일행이 갑자기 멈춘다. 여기 지나가려면 통행료를 내란다. 이 길은 위험하니 돌아가든지 지나가려거든 50불을 내란다. 헉, 천지 앞에서도 그러더니... 날강도를 만난 듯.
어떻게 그 길을 다시 올라가며, 애초에 갈 수 없는 길이면 미리 통제를 하든지 안내를 해놓든지 해야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해 놓고 돈 내놓으라니 말 되니? 그러나 이들은 말이 통하거나 상식이 통하지 않고 막무가내라는 인상이다. 가이드가 길게 협상 끝에 통행료 15불을 주기로 하고 내려오다. 장백폭포는 웅장하게 떨어지고 있더라. 온천물에 삶은 계란을 먹다. 모두 한국인들 소리, 두두두둑 비가 온다.
천지호텔에 5시 45분 도착. 현지식으로 저녁밥을 먹다. 먹을 만하다. 애들은 애들대로 놀고 어른은 저녁에 다시 모여 술 한 잔 하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밤이랴. 12시. 잠이 오지 않는다.
용정으로
용정중학교에서 윤동주를 만나다. 국어교사인 난 만감이 교차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구저렇구 어쩌구저쩌구 윤동주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시물들을 보면서 내가 윤동주나 당시의 용정으로 만주로 간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부끄럽다.
기념품 가게로 간다. 여기 선생님들이 지키고 있는데 표정이 딱딱하다. 누군가 교사라고 말을 튼 것 같은데, 최소한 동업자라거나 동족이라는 느낌은 없는 듯하고 어떤 선생님은 떨떠름하다는 느낌까지 갖게 한다. 왜 이리 낯설지?
'처음 한국인 관광객을 봤을 때는 그러지 않았겠지? 관광객이 너무 많이 와서 이제는 반가움이 덜할 수도 있겠지? 혹 자신들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나?'
이제 이런 표정들에는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심각하지 않기. 잠시 만나는 이들에게 너무 주관적인 내 느낌을 들이대며 판단하지 말기. 그들의 깊은 속을 내가 어찌 아누.... 많은 상념과 아쉬움을 남기고 이렇게 정리한다.
국경도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여기가 중국, 저쪽이 북한 땅이란다. 보트를 타고 약 5분간 두만강을 질주한다. 북한 땅에는 멱을 감는지 고기를 잡는지 한 남자가 나와 있다. 강 폭은 생각보다 좁다. 겨울이면 이 강이 얼 테고, 탈북민들은 이 강을 건너 탈출을 시도하였을 터.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아픈 사연과는 상관없이 물살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은 신나 한다. 완전 관광 온 것 같다. 관광이 맞긴 한데 말이다...
약 1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우리 동포들이 사는 골목길로 들어간다. 어쩜 그리도 못살까. 화장실 냄새가 진동하며 몇십 년 전의 우리의 도시 빈민촌 같다. 목욕탕이라는 집은 쓰러질 듯하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유일한 집이어서 그러나. 마음이 쓰리다.
조선족들은 어디서나 부지런하다는데 이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부지런한 것이 통하지 않나?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 잘 살고 있나?
가이드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월드컵이 열렸을 때 한국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재 이 나라는 일자리의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 많은 사람이 실업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한국으로 가서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는 것, 조선족들은 현재 무지 가난하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살고 있다는 것... 여러 가지 속마음을 진지하게 얘기한다.
이해했어요.
베이징으로
8시 30분 연길에서 북경행 비행기. 한 시간 연착한단다. 우리 짐은 열쇠가 없다고 벌금을 2000원 물었다. 올 때는 아무 소리 없더니 갑자기 웬 열쇠 타령?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9시 30분 보딩. 10시 출발. 비행기 안에서 고행을 하다. 토하고 설사하고 머리 터질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비상식적인 사회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다. 12시 돼서야 북경 도착하다.
비행기에서 우리 짐이 나오다 말다. 공안들은 퇴근한 것 같단다. 뭐라구? 짐이 나오고 있는데 퇴근시간이어서 퇴근을 했다구? 시스템 잘 돌아간다.
북경의 가이드는 공산당, 사회주의 국가라는 데서 이유를 찾는다. 그럴까? 본질을 혼동하고 있는 멍청한 인간과 권력의 문제 아니니? 토론할 수도 없고.... 호텔에 도착하다. 몸이 미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내일 몽고에 가면 잘 씻지도 못할 텐데 오늘 다 씻고 자자.
만리장성으로
6시 20분 기상. 간단치 않은 몸이다. 고단한 9살 아들은 베개에 코피를 적시고 세탁료까지 내고 오다.
서태후가 만든 별장 이화원을 들르다. 그녀의 고난도의 화려한 행적을 가이드가 열심히 얘기하는데 사람 구경 호수 구경하느라 설명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 넓은 호수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그 흙으로 산을 쌓았다니, 이 나라는 인구의 힘, 그 산술적인 수효를 무기로 삼아 모든 걸 가능케 하는 나라 같다.
비가 오는 날엔, 수백 미터나 되는 긴 정자를 거기 그려진 다양한 그림을 감상하면서 호수와 함께 걷는다는 건 내 부러워할 만한 짓이긴 하다. 그러나 이젠 좀 징그럽다. 입이 떠억 벌어지게 하는 크기와 수치들은 이제 그만 감동하고 싶다. 그러나 중국에 있으면서 그게 가능할까? 곧 만리장성일 텐데....
팔달령 고속도로를 따라 만리장성으로 향하다. 산이 가까워 올수록 멀리 장성의 한 자락씩이 보인다. 그때마다 드디어 여기를 와보게 되다니, 그리고 또 놀랄 준비. 땡볕임에도 역시나 사람이 많다. 백두산에선 한국인 일색이더니 여기서는 외국인도 많이 보인다.
케이블카를 타고 팔달령엘 오른다. 난 저 굽이굽이를 다 돌아보고 싶다. 지금 기분으로는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리도 아직 짱짱한데 젊고 어린아이들이 지쳐한다. 녀석들에게는 케이블카를 끝으로 이미 흥미는 마무리된 것 같다. 저기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에만 눈이 가 있다. 이미 불량품인 걸 아는데... 아들은 아빠에게 한판 야단맞고 징징 짜는 모습으로 기념촬영을 끝냈다. 아이들이 지쳐할 만한 날인데, 어른들은 만리장성의 무엇이든 신기하고 궁금한데, 우리는 그것을 몰라주는 아이를 보고 아마도 본전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반항도 못하고 억울함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것은 나중에 얘기 나눠야 할 부분으로 남겨둔다. 지금은 만리장성이 중요하다....
안개가 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뙤약볕은 면했으나, 저 멀리 꿈틀대는 장성의 모습을 훤하게 보지 못하다. 길이가 만 리가 아니라 만 팔천리라 했던가, 징그러운 나라이다. 먼 훗날 이리 버글대는 관광객으로 인해 밑천을 충분히 뽑아낸다면, 목숨을 잃어가며 성을 쌓았던 그 백성들의 한 맺힌 노고와, 진시황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폭정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보상이 되고 해명이 되는 것인가.
내몽고로
중국의 자치구 내몽고는 밤기차로 이동한다. 북경에 있는 이 역이 동양에서 제일 큰 기차역이란다.
침대열차를 탄다. 침대 네 개가 있는 칸이라 처음으로 네 식구가 오붓한 공간에서 지낸다. 12시간의 기차 여행이라, 아이들은 방방 뛰고 흥분한다. 아이들은 위층에 그리 뛰라 하고 우리는 아래층에서 오붓하게 맥주 한잔 한다. 바깥 풍경은 어둡지만 상상만으로도 이국적이기에 안 보여도 충만하다. 책도 펼친다. 호젓함이 밀려온다.
단잠을 자고 아침 7시 20분에 내몽고 자치족의 수도 ‘호화홋’에 도착하다.
어디 색다른 나라일 것으로 상상했는데 기차역 주변은 그냥 다를 바 없는 도시이다. 이색적인 거라면 몽고 글씨가 아닐까. 전혀 감잡을 수 없는 예서 초서 전서~ 모든 걸 합쳐 꼬아 만든 듯한 꼬부랑글씨다. 같은 인간으로 그런 글을 쓰고 익힌다는 것도 재주란 생각이 든다.
차를 타고 초원을 거쳐 구불거리는 길을 지나 우리가 묵을 관광지 마을에 도착하다. 그들의 의식에 따라 술 한 잔을 받아마시고 게르에 배정받다. 오늘 밤 여기서 자는 거다. 아이들이 신나 한다.
말을 타러 간다. 유목민이 그랬듯이 우리도 초원을 달리는 상상을 하며 1시간을 타는데 이놈들이 말같이 달리지 않고 어슬렁 떼를 지어 소처럼 다닌다. 아이들은 더 타고 싶어 한다. 그러렴, 우리 아이들은 한 시간을 더 타는 걸로 하고 저 멀리까지 간다. 저 끝 초원을 따그닥거리며 가는 모습을 보는데 보기엔 그럴듯하다.
낙타도 탄다.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고 사막엘 가자...”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며 어기적거리는 낙타를 탄다. 낙타는 참으로 귀엽다. 가다가 풀이 보일라치면 그냥 글루 가서 뜯어먹는다. 아무 생각 없는 애 같다. 그러다 주인에게 한 대 맞고 다시 제 길로 돌아온다.
저녁에 민속 공연을 보다.
넓은 벌판이나 황량한 사막으로 말을 달리는 호방한 유목민족답게 음악과 춤이 아주 힘이 넘치고 경쾌하다. 병자호란을 배운 나의 생각엔 몽고와 중국이 같은 나라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위에는 몽고국이 따로 있고(외몽고), 내몽고라는 곳은 중국에 편입되어 자치족으로 있다는 것인데 이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여기 여행올 때 몽고라는 나라를 가는 줄 알았다. 조선족이 중국의 자치족으로 편입돼 있는 것도 그렇고 어쨌든 다시 공부하든지 확인해 봐야겠다. 무대에 선 두 명의 젊은이가 눈에 확 들어온다. 매우 열심히 힘 있게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우리 젊은이와 모습이 비슷하다. 예뻐서 기념사진을 찍다.
게르는 생각보다 양호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따만한 벌레를 보다. 기절하겠다. 이불속으로 옷 안으로도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낭패가 없다. 그는 저녁에 독한 술 석 잔을 강제로 받아 마신 통에 이미 기절 상태로 가있어 벌레로부터 날 보호해 줄 처지가 아니다. 아이들이 자고 있고 내가 해결해야 한다. 옆집에 가서 벌레 퇴치약을 빌려온다. 이불과 몸과 옷에 쳐 바른다. 새벽 한 시쯤 나가서 별을 보다. 은하수..... 별이 저리 많구나.
다시 베이징으로
내몽고 자치족 박물관, 공룡화석 박물관, 왕소군묘, 대소사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내려 북경에 도착하는데 막 반갑다. 고향에 온 듯한 친숙한 느낌이다. 별일이다. 난색을 표하는 가이드와 협상을 거쳐 왕푸징거리를 가기로 한다. 번화한 강남의 거리라니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자유 시간을 즐긴다. 줄줄이 따라다니고 설명 듣고 시간 지키고... 이런 것들은 오래 못하겠다. 우리의 남대문시장이나 인사동 같은 왕푸징 상가로 들어간다. 사고 싶은 것이 몇 개 있었으나 흥정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그냥 포기한다. 맥주 한잔 마시는 걸로 자유 시간 끝. 베이징에서의 숙소인 전자 상무호텔로 돌아오다. 아이들이 크고 쾌적한 이 호텔을 좋아한다. 마지막 밤이다.
떠나는 날, 아침 8시 천안문 광장으로 가다. 저것이 뭔 줄인가? 끝이 어딘지 모르게 길게 늘어선 줄은 모택동이 안치된 시신을 보기 위한 줄이란다. 그렇지,역시 중국이야. 천안문에 모 주석의 사진이 걸려있다. 굉장히 궁금했던 곳인데, 볼 수는 없겠다. 볼 마음도 사라졌다.
첩첩궁궐의 자금성.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우리의 궁궐을 어떻게 보았을까?
우리가 자랑하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이런 '아담한' 것을 볼 때 이들의 정서는 무엇이었을까?
중국에 대하여
북경공항에서 만만디로 마무리하다.
짐을 부치는데만 1시간 반이 소요되고 결국 뛰어서 비행기를 탄다. 중국,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다.
인천공항이 보인다. 동양 최대라고? 이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늘 말썽 피우던 우리의 배낭 짐이 제 때 제 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니 대견하고 반갑다.
집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예의상, 다녀온 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몇 마디 해주고 싶다. 중국이 들을 수 있으려나.
'커다란' 것이 '위대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중국이란 나라가 사이즈에 맞게 품격을 지키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게 가능할까?
처음 이 나라를 방문했을 때,
'도대체 이 큰 땅덩어리를 어떻게 관리하려고 그래? 있는 자기 땅이나 잘 돌보지 남의 민족은 왜 자꾸 침략하고 편입시키고 그래...' 이런 의문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두 번째 방문 때도 마찬가지다. '욕심이 끝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워낙 큰 땅이어서 워낙 가까운 이웃 땅이라 앞으로 또 방문할 가능성이 있을 게다.
하여, 제발 인간 소중한 줄 알고 대국답게 이웃나라와 지구에 책임감을 갖고 상식적으로 시스템 잘 정비하길 바라는 맘이다.
두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하여 결정한 다음 여행지 방향은 이렇게 정한다.
"우리 다음엔 여기보다 시설이 좀 낫고, 발전한 나라를 가보자. 시스템이 상식적으로 돌아가고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라를 가보자."
2002.8
중국 에필로그
2018,7월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여행’의 이름으로 다시 다녀오다.
1. 북간도와 기독교
용정에 있는 윤동주 생가 복원터 및 기념관(윤동주 생명 전시관), 그리고 명동학교 터의 전시관은 관광지로 개발해 놓았는데 조선족이나 한국인 외에 중국인들도 관광을 온다 하고 모두 입장료를 받는다.
아니 중국인들이 왜? 놀랐으나 더 놀란 것은 윤동주를 ‘중국인 조선족’으로 복원했다는 것!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 윤동주가 중국인이 될 수도 있구나. 그게 중국의 남의 나라 역사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는 동북공정 그런 것의 일환이구나. 정말 중국 왜 그러니!!! 모든 것을 자기 입 안에 욱여넣는 어리석음의 끝판왕 탐욕덩어리를 보는 듯하다.
그의 시가 쓰인 커다란 돌덩이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동주의 시와 어울리지 않는 돌덩이하며 글씨체들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를 읽는데 감흥이 안 생기고, 그의 깊은 영혼이 우롱당하는 것 같다. 그의 생가는 원래 있던 곳에서 그대로 갖다가 복원해 놓았다 한다. 기념관에는 그의 학생 시절, 그리고 일본 감옥에서 죽기 전의 사건이 사진과 모형들로 채워져 있다. 더워서 정신을 못 차리는 중에 눈으로 훑어보는데 여기서 그를 만나는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이게 정상적인가....
여행 오기 전에 공부한 윤동주의 북간도에서의 삶과 시, 그의 삶에 절대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었던 ‘기독교 사상’을 생각한다,
김약연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뗄 수 없는 사상이자 신앙임을 새로이 알게 됐다. 일제를 피해 북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은 학교를 세웠다. 학교에 좋은 선생님을 모시기 위해, 단 하나 ‘조국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의 절실한 마음으로, 오랜 세월 그들의 신념이었던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들의 처절한 결단이 눈물겨운데, 이 북간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기독교 사상이, 이들에 의한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의 맥으로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대의 한국 기독교가 이렇게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인 인다.
2. 천지에서
이도백하거리를 지나 자작나무숲길을 거쳐 호텔이 있는 버스정류장에 내린다. 거기서 10인승 정도의 봉고를 타고 구불구불 올라가 천지 밑에 다다르다. 예전에 지프차로 오를 때보다 길이 더 좋게 닦여 있다. 그때는 짙은 안갯속이었다.
오늘 하늘은 조각구름 몇 개, 그리고 태양 작렬, 그러나 신비한 바람이 분다.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보인다! 환희처럼 위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천지는 온전히 그 몸을 맘껏 드러내놓고 있다. 아! 우리의 저 땅! 건너편에 북한 땅, 내가 처음 여기 올 때 난 백두산이 우리 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반은 중국 땅, 여기는 중국인이 주인행세를 확실히 하고 돈을 모으고 있다. 언젠가 다시 오는 날은 북녘을 통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다 제쳐두고 오늘, 이 순간, 우리는 천지의 그 상서로운 모습을 보았다. 교인답게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도 부르고, 홀로아리랑을 부른다. 눈물이 난다.
우리는 마지막 차를 타고 와서 마지막 차를 간신히 타고 천지를 떠날 때까지 벅적이지 않은 천지를 보았다. 돛대기 시장 같지 않은 천지를 온전히 만나고 있다.
3. 결국은 중국도 아니고 우리야!
뽑기로 결정하는 룸메이트 오늘 내 짝은 K 청년.
탈북민 청년이다. 밤새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완전 혼란스러워졌다.
미안함, 부끄러움, 속상함, 분노, 염려, 위로와 격려...
스물일곱의 아이가 겪기에 너무 힘겹고 무거운 삶의 무게이다. 탈북의 과정, 한국에서 정착하기까지 이야기가 눈물겹다. 정체성의 문제, 불안한 현재, 미래에 대한 염려, 통일에 대한 기대와 불편함, 눈물.... 여기 오기 전 찾아봤던 탈북민의 아픈 문제를 이 아이가 고스란히 갖고 있다. 내 가까이에, 내 앞에 이런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동안 전혀 알 수 없었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이 젊은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나는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분노하고 무엇을 떠들어대고 있었을까. 한심하고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함을 알다. 잘 자라 아이야. 힘내거라. 우리 함께 힘내서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