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험한 길이다만 역시 노르웨이야!
피오르드가 저 아래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허공에 솟은 혓바닥 같은 바위 끝에 아슬아슬 서있는 뒷모습, 그냥 서있는 게 아니라 피오르드를 향해 알몸으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완전 깜놀했다. 그 도발적인 인간, 자연 자체인 날것의 인간의 몸이라니!
그곳이 노르웨이에 있는 트레킹 코스 중 하나 '트롤퉁가'이다. 가슴이 떨린다. 가야지!
난 이렇게 시작하는 여행이 가끔 있다. 사진 하나에 꽂히고, 다녀온 지인이 감동을 전하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확 당겨서 가는 여행 말이다. 선경험자들의 안내와 나눔에 감사를 표하며!
스타방게르, 노르웨이의 유명한 세 개 트레킹은 이 작은 도시에서 시작한다. 하여 여기로 와야 한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아침 8시 30분발 비행기여서 전날 기차역 바로 옆 숙소에 묵었다. 공항까지 두 정거장, 조식도 먹지 않고 이른 시간에 나온다. 검색도 수속도 금방 끝난다.
너무 여유 있었나 보다. 눈에 보이는 면세점에서 어슬렁어슬렁 구경하다 돌아가 보니, 그가 게이트 앞에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뭔가 말할 수 없는 낯선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비행기가 문을 닫았단다. 우린 탈 수 없단다. 우리 짐은 내린단다. 뭐라꼬? 정말? 황당 황망.
" 나는 보딩 시간 맞춰 온 건데? 보딩 시간이 30분 아냐?"
" 노! 출발 시간이 30분!"
게이트에서 항공사 직원은 안타깝다는 건지 답답하다는 건지 그런 얼굴로, “마담, 너무 늦었어요.”를 연발한다. 그래 나 마담이다. 그냥 지금 얼른 태워주면 안 되겠니?
노!! 문 닫았단다. 그리고 T2로 가란다. 반복해서 T2라고 알려준다.
하 기가 막히면 풀이 죽는다. 넓은 공항의 터미널 1에서 터미널 2까지는 길다. 거기에는 우리 말고도 뭔가 복잡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상담 중이시다.
우리보고 다른 비행기가 연착했냐고, 아니 그냥 우리가 놓쳤지. 아침 몇 시에 왔냐고, 6시 30분에 왔다고.
다시 티켓을 끊어야 한단다. 알겠다. 그래야겠지. 내가 늦은 거니까.
열심히 내 이름을 불러댔다고 하는데 난 전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공항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안내 멘트들이 나를 부르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의 영문 이름 'Ja'를 자기네식 발음으로 '하'라고 했다고, 그가 계속 ‘자라고!’ 외쳤다는데,
"자기가 직접 방송하지 그랬어, 그럼 내가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아니, 마이크를 줄 수 없다고 했단다... 이런... 어쨌든 비행기는 떠나버렸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은 오랜 시간 열심히 어딘가와 통화를 하더니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9시 40분 비행기 타면 된다고, 돈은 안 내도 된다고, 짐도 스타방게르 공항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KLM항공! 만세!!! 감동 감사이다. 그녀와 기념 촬영을 못한 게 아쉽다. 고맙다고 SNS에 올려줄 수도 있었는데……. 수많은 여행 중 난생처음 이런 경험을 하다니 앞날이 기대되는군…….
1시간여 만에 스타방게르로 오다. 아주 느긋하고 기분 좋게.
정녕 짐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러나 벨트가 멈출 때까지 우리 짐은 보이지 않는다. 카운터에 문의하니 짐이 안 왔다고, 우리 짐이 어딘가로 갔다가 다음 비행기로 온다고, 짐이 오면 호텔로 보내주겠다고. 직원이 어찌나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지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왕 은혜를 베푸는 거 일처리 좀 깔끔하게 해 주지 않고는.
우리 묵을 곳이 주소 분명한 호텔이 아니어서, 결국 공항으로 2시에 찾으러 오겠다고 하고 나온다. 정확히 다음 비행기로 오냐니까, 그러길 희망한단다. 희망한다고? 쓴웃음만 나오는데 직원이 워낙 친절하게 뭐라카니까 그냥 온다.
일단 렌터카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이건 뭐 너무도 간단한 수속으로 끝.
안내 말씀도 없고 주의사항도 없고 열쇠 하나 주고 차 있는 주차장으로 직접 가서 찾아가란다. 처음 보는 스마트키를 내주는데 어케 쓰는 거지? 나 혼자면 못한다. 페북 사진에 꽂혀 무조건 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 하나만으로 그를 꼬셨고, 쉽지 않은 (잡다한~) 나머지는 거의 그가 준비하고 예약했다. 어찌어찌하더니 넓은 주차장에서 그가 차를 움직여 데리고 나온다. 와 잘한다! 왕 칭찬!
아시아마트로 차를 굴려 간다. 볼보, 부드럽게 굴러간다. 좋군. 영국에서 열흘간 좌측통행 자동차를 보다가 다시 우측통행 자동차를 보니 완전 헷갈린다. 같이 운전해야 하는데 나 가능할까? 쿱에서 장을 보고 공항으로 다시 온다. 짐아, 제발 와 있어라.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쇼핑을 하다 비행기를 놓쳤다고 전한다. 황당해하는 아이들 표정이 훤하다. 엄마 이상해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많이 기가 막히고 좀 한심하다.
아까 그 직원이 문을 열어주고 짐 나오는 곳으로 안내하는데 저기 우리 캐리어 두 개가 놓여있다. 오오, 무조건 감사 인사를 하고 나오다.
이제부터 여행 시작이다. 달린다. 달리는데,
세상에, 길이 이렇게 오묘해도 되는가.
풍경은 흠 없이 아름답다. 수많은 바위산들, 어디서도 보지 못한 노르웨이만의 풍경이다.
그런데 산으로 오르는 어느 지점부터 차도는 일차선의 외길이다. 당근 노란 중앙 차선은 없고, 여길 두 대가 마주 보고 달리게 만들었다. 주변은 낭떠러지도 많고, 양도 막 나타나고……. 아, 정말 가슴 좀 조아리게 길을 만들어놨네. 한국에서 베스트 드라이버라는 나, 이런 곳에서는 운전 못하겠다. 특히 숙소에 도착하기 직전 터널을 뚫고 내려오는 길은 참으로 무지막지하다. 천 길 낭떠러지에 길은 외줄기, 우린 나그네 맞다.
터널 안도 1차선이었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어떻게 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중간중간에 약간 여유를 둔 공간들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알아서 피하라는 뜻인 것 같다. 각자 안전 운전하고 각자 생존하라고? 약 세 시간 달려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하다. 리세피오르드의 끝 리세보튼이라는 지역.
오는 길은 진정 환상임을 인정! 그런데 내일 트레킹 할 '쉐락볼튼'을 가려면 이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다. 오마이…!
우리 숙소는 2인실 캐빈이다. 넓은 풀밭이 펼쳐진 야영장에 텐트도 쳐있고 캠핑카도 있고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휴식을 취하고 계시다. 바로 앞에는 리세피오르드가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그림이다. 네덜란드에서 아들에게서 건네받은 밥통에 밥도 하고 된장국도 끓이고 돼지고기를 고추장에 버무려서 제육볶음으로 반찬도 만들었다. 거기다 맥주! 완전 천국의 식사를 하다.
오늘 긴 하루는 어찌 보냈는지 벌써 다 까묵다. 피오르드 가까이로 나가 산책을 하다. 공기는 싸하니 좋고 사람들 평화롭고 이 경치는…….
아, 우리는 오늘 하루 역전의 긴 파노라마를 지나왔다. 내일부터 펼쳐질 노르웨이의 진수, 트레킹!
기대 만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