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고, 너를 만나는 시간
산티아고 가는 길
1. 꿈에 그리던 순례자의 길 떠납니다.
전체 800km 거리로, 하루 약 25km 30여 일 예정하고 있어요. 완주가 목표지만 다리와 몸 상태를 봐야겠지요. 은퇴 후 꼭 도전하고픈 1순위여서 기대 만발, 그러나 걱정도 만발입니다. 걷는 동안 몸은 좀 고통스럽겠지만, 마음은 조금이나마 성숙해지길 기원합니다. 건강히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리며, 저희도 식구들 한 분 한 분, 이웃 한 분 한 분, 어여쁜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며 걷겠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이렇게 인사 나누고, 오늘 4일째 약 100km를 걸었다.
밤에는 뼈와 살들이 구석구석이 못 견디게 아우성이나 아침에 다시 가뿐해지는 몸이 신비롭다.
길을 걸으며 감동에 시큰거린다. 내 오래된 무릎도 그렇다.
2. 긴 길이다.
799km 걸었다고 인증해 준다.
하늘색보다 더 새파란 하늘을 보고 걷는 길, 끝이 보이지 않는 메세타 평야를 걷는 길, 지독한 안개 속의 숲을 보고 걷는 갈리시아의 길, 길은 초, 중, 종반 이렇게 색깔을 달리한다.
그러나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양의 길이 있어 오늘은 어떤 길이 나타날까 설레면서 걷는다.
일과는 ‘걷고 먹고 자고’이다. 하루하루 이것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육신의 고단함과 일상의 단순함이 주는 삶의 매력이란……. 우리 살고 있는 지금, 나,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않나. 너무 복잡하게 살고 있지 않나.
하루 최소 세 번 이상 천국을 맛본다. 길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한 번, 기력이 소진될 만큼 걸은 후 마시는 맥주 한 잔에 한 번, 순례자용 저녁메뉴에 기본으로 나오는 질 좋은 와인 한 병에 한 번. 그리고 푸욱 까무러지는 잠.
이틀, 무척 힘들었다.
하루는 조금 큰 도시로 들어서는 날, 쌩쌩 달리는 찻소리와 함께 종일 아스팔트길을 걸은 날이다. ‘문명이’에게 두들겨 맞고 조롱받은 느낌이다. 그 많은 차에 놀라고 길을 건너느라 허둥대는 자신을 보고, ‘나 서울에서 사는 거 맞나. 지금까지 어떻게 그런 곳에서 문명이랑 친하게 잘 살 수 있었던 걸까.’
또 하루,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면서.
추적거리는 비와 음침한 안개에 나타난 소똥 범벅의 길, 그 질척거림에 발을 디딜 수가 없다. 마을로 들어설 때마다 번지는 소똥 냄새에 맘이 무척 불편하다. 커다랗고 뭉개진 소똥을 밟을까 봐 소똥만 보고 다닌다. 무성한 숲의 신비한 풍경이 아니라 소똥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이 한심함, 우울함. 뭣이 중한디 이 바보야. 도시도 안 되고 촌도 안 되고 어쩌라구!
3. 아, 사람
길에서 잠시 쉬다 프랑스인 노부부와 인사를 나누다.
까미노는 세 번째이며 이번에 완주할 계획이시란다. 그 연배에 놀랍다는 마음은 숨기고 연세가 궁금하여 머리를 쓴다.
"와우! 근데요 우리 아자씨도 오고 싶어 하는데 나이가 걱정되시나 봐요. 실례지만 연세가?"
무뚝뚝한 할아버지는 몬 알아들으시는 것 같고, 할머니만 끝내 연세만 빼시고 조곤조곤 얘기하신다. ㅎ. 할아버지는 큰 배낭 메고 묵직하게, 할머니는 소녀같이 사뿐사뿐 꼬장꼬장 잘 걸으신다. 이후 두 분과 같은 숙소에서 세 번, 그것도 옆 침대에 자게 되면서 통성명을 한다.
할머니는 '이벳', 할아버지는 '알랭'!
"오! 알랭 들롱의 알랭요?" 화들짝 아는 체 재롱을 부리니, 그렇다고 좋아하신다.
그날 밤, "무슈 알랭~ 본느뉘!" 두 번째 재롱, 할아버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뽀뽀를 뿅뿅 날리신다. 완전 귀엽다.
이후로 할아버지는 우리를 만나면 무척 반가워하신다. 특히 남편에게는 막내 동생이나 아들 대하듯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목을 막 쓰다듬는다.
그날 세 번째 옆자리에 자는 날.
내가 "이벳!" 조용히 부른다.
"응?" 내게 돌아눕는다.
"사실은요, 제가 고등학교 때 1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걸랑요."
"엉? 그래요!"
"근데 다 까묵었어요."
"나도 사실은 학창 시절에 스페인어를 1년 배웠다우. 근데 너무 어려웠어. 나도 다 까묵었지. 너무 오래 전이야.ㅎㅎ"
"근데 이벳, 아다모 알아요?"
"아다모 알지. 내가 광팬이었다우."
"와우, 저도 무척 좋아한 가수예요. 아다모가 우리나라에 왔었거든요. 그때 콘서트 장에도 갔었어요. 근데 그분 지금은 천국 가셨나요?"
"그렇지……, 응? 뭐라고?"
"죽었냐구요."
"아니, 아니, 지금도 노래하고 있지. 지금 70대이니까."
"아, 그렇군요. 우리나라에서도 겨울에 눈 오면 '통벨라네쥐~' 이 노래 나와요."
"오, 그렇구나!"
잘 자라는 인사를 끝내고 돌아눕는데 이벳 할머니가 조용히 남편 쪽으로 돌아누우며
"알랭!" 속삭인다. 저기 한국...어쩌구 저쩌구...아다모 어쩌구저쩌구...으헝? 소근소근소근…….
두 분은 늘 조용히 대화를 나누신다. 아침에는 할아버지가 부인의 침대 쪽으로 와서 조용히 뽀뽀를 하며 인사를 전한다. 아름다워라.
아침에 헤어지며 할머니께 인사드린다. 오늘 가는 목적지가 달라서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벳,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나겠지만 아마 오늘 이후로 우리 못 볼지 몰라요. 건강하게 잘 걸으시구요, 산티아고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수첩을 꺼내신다. 수첩에는 많은 정보가 필기체로 깨알같이 적혀있다. 이메일을 교환하고 두 손 꼭 잡고 알랭과도 인사.
우리는 산티아고 도착해서 몇 번이고 광장을 서성였다.
미사에 참석하려 대성당에 들어가는데 아는 얼굴이 있다. 미국인 젊은 여성. 발바닥이 짓물러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웠는데 혼자 씩씩하게 걷던 '이브', 무사히 왔구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I'm missing you!" 손을 잡고 반가워한다.
나도!
나도 또 그렇게 보고픈 사람이 있단다.
우리는 떠나는 날까지 광장을 뒤돌아봤다.
"우리도 이벳이랑 알랭처럼 나이 들고, 그렇게 살자."
“그리고 다시 꼭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