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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쌤 Sep 28. 2023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성경과 권정생

 성경을 다시 읽다그리고 권정생을 생각하다.


 성경은 과학처럼 증명이 되냐 안 되냐의 관점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신학이니까.

 그러나 성경은 신학이자, 문자와 수많은 비유와 이야기들로 엮어진 방대한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와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에 따라 읽을 필요가 있다. 어느 한 구절을 두고 앞뒤 없이 읽어버리거나 섣부르게 자기 삶에 적용하면서 '깨달음'을 얘기해 버리면, 성경의 메시지를 오독할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는 성경을 텍스트로 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그가 가장 전하고 싶어 했던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고, 문학적 맥락에 따라 통으로 읽었다.

 신학 공부가 어렵다 한다. 박사도 쏟아질 만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예수님 말씀이 뭐가 그렇게 복잡한 건지, 심연을 파헤치듯 오랫동안 고통 속에 탐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성경은 많은 부분이 나같이 평범한 신도나 문학도가 읽기에도 크게 어렵지 않은, 너무도 분명한 기본적인 메시지가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탐욕의 우상을 섬기지 마라.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무지 어려우니라. 일용할 양식만 구하고 내일 일을 염려 말라. 내가 다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와 목마른 자와 소외된 자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앉아서 섬김을 받으려 말고 섬기는 자가 돼라.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어라. 지금까지의 거짓된 제사, 거짓된 믿음에서 마음을 돌이키라. 공의와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게 하라. 주여 주여 외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너의 삶으로 이 땅에 내가 있음을 보이라. 그곳이 천국이니라......”


 이 선명한 말씀 외에 무엇이 더 숨어있는가? 어떤 심오하고 새로운 학설이 끊임없이 필요한가?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신에 대한 나의 이해는 깊이를 달리 할 수는 있겠으나, 더 공부한다고 기본이 되는 이 메시지가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를 보면서 성경 말씀과 연계하여

불편하고 죄송한 마음들,  '불온한' 생각들,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의문들이 요동친다.


1. 인간이 신의 존재 유무를 '믿는 것' 말고, '아는 것'이 가능한가?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기독교의 하나님, 유대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하나님(알라)'이 서로 다른 하나님인가?

3.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신들에게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고 깊은 신심으로 살고 있는데,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나님을 인간보다 못하게 그렇게 협소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4.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허를 내주셨다? 광활한 우주를 창조했다는 조물주가 인간과 다른 생물, 민족과 민족을 구별 지어서 편애했다는 얘기일까?

 처음엔 이스라엘 민족만 사랑하여 구원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타락하자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고 바울이 말한다. 이유는 그들이 질투심을 느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이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봐야 하나?

5.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탐욕 부리지 말고 선하게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 아닐까?

 레위기에서처럼 그렇게 복잡하고 엄격하게 제사 지내라는 말씀일까? 당시의 종교권력자인 제사장들이 규제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통치자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6.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유대교는 율법주의화 되고 종교 우두머리들이 성전을 더럽히며 타락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의 의'로부터 괴리된 나라, 그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보고 애통해하며 그들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님은 참 제자, 종교 개혁자,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7.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외아들에서 나아가 그가 곧 신이라는 의미로 전개된다. 그 어려운 삼위일체 개념은 진리인가? 교리인가? 당시 이 논쟁으로 이단을 만들어내고 쫓아내고 처단하고……. 종교인과 학자들의 끊임없는 논쟁 끝에 확정된 개념들을 오늘날도 신도들이 절대 진리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 무슨 말인지 신도들은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8. 역사 이래 교회와 예수는 관계가 있었을까? 예수님의 고단한 삶과 말씀이 오늘날의 교회와 교인들의 행태와 어울리나?

 ( 정녕 예수의 말씀 따라 살고자 하는 아주 소수의 교회, 기독교인들을 보면 완전 무관하지는 않다만)

 바울은 생전 예수를 전혀 알지 못했다. 회심 이후 그는  ‘유대교’를 바탕에 두고, '예수님의 삶'보다 ‘예수의 죽음, 십자가, 부활, 재림’에 집중하여 교리를 만들고 집대성하여 종교화한 것이 아닐까?


 초대 교회를 세우고 선교 여행을 하면서 바울은 신도들에게 편지를 쓴다. 바울의 전언이 예수님의 행적보다 더 중요하게 더 많은 양으로 설교되고 있다. 그의 주옥같은 '신심'과 '행적'과 '이론'이 기독교의 바탕이 되고 공고화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교회와 예수의 괴리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상상이라도 했을까?


 이 땅 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


기독교가 있기 전에,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있었고 信心이 있었다.


 아침 아홉 시에 온 일꾼이나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하루 살아갈 품삯을 주라고 가르친 것이 예수님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겐 먹고 살아가는 데는 어떤 경우라도 제 몫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공중에 나는 새도, 들꽃 한 송이도 제 몫의 양식은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벌써 주신 것이다. 교회에 가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한다고 새삼스레 하느님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게 아니다.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정의나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주님의 기도문엔 처음부터 끝까지 나 하나만을 위한 기도말은 없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다. 나만을 위한 기도는, 곧 나만을 위한 삶이 있을 뿐이다. 주기도문은 앉아서 입으로 외는 기도가 아니다. 행동하는 기도, 살아있는 기도다. 하느님 나라가 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도다. 하느님의 나라엔 특혜라는 건 없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나님' 중에서


  이분을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참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고자 한 분, 평화주의자, 생명주의자, 참 문학인, 양심, 신앙, 신념에 철저하게 응하며 그대로 삶을 산 사람, 가난한 이웃에게 한없이 마음과 물질을 열어놓은 분, 기독교 신앙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정확하고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신 분, 옷 한 벌로 가난하게 살다 다 주고 가신 분, 용기 있는 분.

 어디서 그렇게 깊은 지혜를 얻고 계실까. 공부를 많이 한 분도 아니다. 


 꾸미는 말 쓰지 않고 사족 붙이지 않고 어려운 신학적 용어 쓰지 않고 권위 부리지 않고, 아주 분명히 예수를 전하며 구도하는 자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분이다. 예수님 같다고 느꼈다. 

이런 참 신앙인이 적지 않을 텐데, 이 땅에 기독교인이 천만이라는데, 그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 노력한다면, 이 땅은 이미 천국일 텐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핍박받았던 교회들이 중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종교 집단이 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수많은 전쟁들, 악행들, 혐오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화려하고 높은 성당과 교회의 첨탑 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예수가 십자가에 걸려 있다.

아, 가엾어라, 기괴한 언밸런스를 보는 느낌.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지 못하겠다. 이제 내게는 큰 의미가 없다. 삶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을 거란 얘기다.

 신이 있다면, 신은 ‘지금, 여기서’ 천국을 이루며 살라고 인간에게 숨을 줬을 것이라 믿고 나는 그의 섭리를 따라 살면 된다는 생각이다.  

 신이 없다한들, 내가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이 세상을  함부로 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양심에 따라 살아도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더 물신적이거나,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고, 사회 정의에 무심하게 살면서도, 교회만 다니면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다. 십자가를 들고 험한 욕설을 뱉으며 타인을 정죄하는 광화문 성도들을 보면서 누가 예수를 떠올릴 수 있을까. 많은 이를 '실족하게' 만드는 종교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 아닐까, 되돌아봐야 하지 않겠나……. 


 우주의 한 점도 안 되는 인간이 하나님을 규정하고 있다. 아주 초라하고 협소하고 왜곡된 형태로 인간화하고 있다. 교회나 교리나 종교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신탁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기자들을 통해 성경에 말씀해 놓으셨다고? 그러게. 제발 그 성경 말씀대로만이라도 살라니까!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 5장 중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는 '구원의 소리'로 들린다.

 많은 이는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간다."는 말씀이라고 들을 것이다.

나는 아쉬워 불온한 사족을 붙인다. 


 “맞아요. 예수님을 따르자니까요, 교리나 교회나 목사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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