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류시화
어디선가 북소리가 둥둥 울려온다.
나의 영혼을 흔들어 놓고 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읽은 인디언의 감동적인 서사와는 또 다른, 종교와 신앙과 신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다.
9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연설문과 지혜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다. 경외스럽고 놀랍다.
‘흰 얼굴을 가진 자’ 백인들이 무기와 종교를 들고 이들이 조상 대대로 살았던 땅을, ‘발견’했다며 들어왔다.
‘굶주린 거지 떼’와 같았던 백인들은, 자신들을 형제로 품고 살려놓은 '붉은 얼굴을 가진' 원주민들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으로 몰아넣고 ‘보호’한다며 억압하였다.
예수님이라는 ‘종교’를 가지고 ‘야만인의 종교’를 개종시켰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정신을 무너뜨렸다. 자연을 정복한다며 온 땅을 헤집고 생명을 파괴했다.
나는 성경책을 읽듯 이 책을 읽었다. 성경 필사하듯 인디언들의 '말씀'들을 필사했다. 예수의 말씀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이런 불경스러운?
정신의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깨달음의 영성을 느껴보고 싶은 분, 특히 신을 경외하는 기독교인은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먼저 최대한 간추린 말씀 몇.
당신은 당신의 종교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또한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 역시 조상 대대로 그 자식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그 종교는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서로 사랑하라 이르고,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한다고 일깨웠다.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란 사람 개개인과 신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공기를 사고판단 말인가 (시애틀 추장) 중에서
우리는 안다. 모든 종교적인 열망, 모든 진실한 예배는 똑같이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또 안다. 학식 있는 자의 신, 어린아이의 신, 문명화된 사람의 신, 원시적인 사람의 신이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신은 결코 생김새가 어떻게 다른지를 놓고 우리를 판단하지 않는다. 신은 이 대지 위에서 올바르게 살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인다.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종교는 어떤 특정한 교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교에는 설교도 없고, 개종이나 박해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종교를 무시하고 비웃는 일도 없었다. 무신론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라 마음 상태였다. 자연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사원도 신전도 없었다.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인디언의 영혼 (오히예사) 중에서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우리는 그 밖의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우리를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답답함을 느낄 따름이다.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상처 입은 가슴) 중에서
우리는 종교의식을 통해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가슴 안에 자기만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당신들도 자기만의 교회를 가슴 안에 갖고 있다. 당신들이 그 교회를 따를 때 당신들은 위대한 정령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세상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해도 자기 가슴속의 교회를 잃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우리 인디언이 가르침을 받은 방식이다.
*겨울 눈으로부터 여름 꽃에게로 (구르는 천둥) 중에서
우리 부족에서는 지혜로운 이들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 호칭에 어울리는 진정한 인격을 갖추고 있다. 당신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당신들의 정신에 영감을 주고 당신들의 삶을 인도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그 사람은 상한 갈대 하나 꺾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지 말라. 당신들의 위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몰라도.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더 이상 야만인이라고 부르지 말라. 당신들은 열 배나 더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많이 다른가? 인디언들의 나라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와 전혀 다른 이방인의 나라인가? 그들이 부르는 '정령'은 ( 우리 어머니들이 정화수 떠놓고 비는 '하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잡신인가?
인디언들에게는 '바울'도 없고 '교리'도 없고 '예배의 형식'도 없고 '예배당'이 없어서 야만인의 종교인가?
읽을수록 심경이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해야겠다. 이 긴 글에서 이들의 삶을 어떻게든 규정해보고 싶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해 본다.
1. 인디언들은 우주와 생명의 원천인 그런 신을 믿고 사랑했다.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2. 자연을 품으며 모든 생명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다.
3.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이웃과 나누었다.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말씀하신 것이 이것 아닌가? 이게 신앙 아닐까?
그들은 온전히 창조주의 뜻대로 살았다.
신에게 예배드릴 때 형식을 갖춘 종교의 형식으로 만나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예수가 인디언이 아닌 것'에 놀란다.
백인을 통해 전해 들은 예수는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습과 다름없는 말씀을 전하고 있고 자신이 그렇게 산 사람이었다. 그러나 ‘흰 얼굴을 가진 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들이 전한 예수와는 전혀 딴판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디언들에게 신앙이란, 개인과 신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누구나 홀로 침묵 속에서 신을 만난다'는 것이다. 신을 향한 그들의 절대적 신뢰, 언제나 어디서나 침묵을 통해 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삶, 인간과 자연과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경건한 삶. 이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그들이 아는 신앙이었다.
인디언들의 삶과 영성, 그들의 정신세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아, 백인들은 미개, 경악이라고 표현했다.)
사냥을 할 때 동물에게 드리는 정중한 의식과 감사에서 알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보라.
동물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준다. 그것은 나눔의 가르침이다. 동물들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목숨을 포기한다. 인디언들은 사냥을 나갈 때면 가족을 먹일 수 있도록 동물을 한 마리 보내 달라고 위대한 정령에게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래서 동물과 만나면, 그것은 그 동물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동물을 죽인 다음에는 심장을 꺼내 사냥꾼들이 한 조각씩 나눠 가진 뒤 감사의 기도와 함께 어머니 대지에 묻어주었다.
인디언들이 어떤 동물을 사냥할 때, 그 동물은 우리가 자신을 죽여 자신의 살을 먹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나는 그 동물에게, 내가 살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그의 뿔과 머리뼈를 버리지 않고 아름답게 색을 칠해 보관한다. 그것이 그가 내게 준 선물을 존중하는 나의 방식이다.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상처 입은 가슴) 중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 잘못한 자에 대한 너그러움과 포용, 아이를 대할 때 온 마을 어른들이 보내는 보살핌과 기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들, 그리고 어른에 대한 이해, 지혜로운 자에게 보내는 존경을 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또한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른 소유에 관한 개념, 땅과 공기와 자연에 대한 의식과 감사, 자연에서 나오는 모든 약초들, 먹이들, 냄새들에 대한 감사와 경건함, 물질문명과 환경의 재앙에 대한 경고…….
하나같이 품위 있고 지혜 있는 덕목들이다.
오랜 기간 신앙인이라고 살아온 나의 삶이 부끄럽다.
반성과 회개하는( 메타노이아, 돌이켜 생각하는) 깨달음이 가슴을 친다.
신앙이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신을 바르게 알고 있을까? 신앙과 상관없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신을 종교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고 '나'와 '우리'를 위한 이기적인 신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차별하며 약자를 혐오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탐욕과 전쟁의 신으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교리로 무장된 지식을 하나님 말씀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상식을 초월한' 신앙의 삶을 '상식에도 못 미치는' 졸렬한 신앙의 경지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하며 살고 있는가?
그들의 신앙과 지혜와 고요함에 빠져들면서도 한편으론 무겁고 힘들게 읽다.
‘지구별’에 사는 인간의 삶이 이렇게 참혹하고 무거울 수 있을까. 여전히 정체성을 잃고 빼앗기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정신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후손들의 외침도 이어지고 있다.
침략과 강탈과 종교를 이용한 탄압으로 시작한 미국인들의 역사를 보면 말할 수 없는 회의가 몰려온다.
미국뿐이랴, 제국들이 선교란 명목으로 저지른 추악한 만행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광범위하게 일어났는가…….
이것은 21세기 현재도 진행형이다.
신의 이름으로 남의 영혼을 털고 빼앗고 굴욕을 강요하는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용서가 될까?
신이 있다면 말이다. 만약 그분이 사랑과 평화의 신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