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슐러 K. 르 귄
“오,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솔직히 말해 팔십삼 년을 사는 일이 그저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 상태이다.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에게 “오, 선생님은 불구가 아닙니다. 스스로 불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불구가 되는 법이지요! 제 사촌은 척추가 부러졌었는데 금방 이겨내고 지금은 마라톤 경기에 나가려고 훈련을 받아요!”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내 노년을 부정하는 말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내 나이를 지우고, 내 삶을, 나를 지운다.
노년과 젊음, 삶, 문학, 여성, 종교, 생명, 자연 등 정신적 사고의 주축이 되는 소재를 중심으로, 추리 소설가인 작가가 나이 80 이후에 쓴 에세이들이다.
80이 넘어 이런 멋진 글을 썼다는 게 반갑다. 통찰과 연륜과 내공이 놀라우며, 위트와 풍자가 재밌고도 깊다. 노년기에 대한 그녀의 분명한 인식과 당당한 자세가 멋지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처럼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거나, 정신을 젊게 가져야 한다거나, 젊게 살려 노력해야 한다거나, 젊은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무늬만 젊은 얄팍한 세상이 선전해 대는 영혼 없는 말들은 '개나 줘버려'라고 날리는 것 같다.
노인에게 젊어 보인다고 칭찬하는 것은 노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란 말에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관절이 아픈 대로 허리가 구부러진 대로 육신 아픈 대로 몸의 노쇠함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지론과 일치한다. 그녀는 살아온 삶의 이력으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그 노인'을 보라고 말한다.
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내용도 인상적이다. 사실과 믿음의 이야기를 혼동하지 않기, 그래서 고통을 덜기.
그 외 여성의 문제, 생명에 대한 깨달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속에서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는 일체감 등, 다루고 있는 다양한 주제의 내용들이 끊임없이 읽고 쓰고 성찰한 자만이 풀어낼 수 있는 글임을 알겠다.
여가'에 대하여.
노인에게 여가 시간에 뭐 하냐고 묻는 이에게,
‘할 일이 없는 시간’이란 찾아낼 수가 없다. 나는 자유롭지만 내 시간은 그렇지 않다. 내 시간은 잠을 자고, 백일몽을 꾸고, 업무를 보고, 친구와 가족들에게 이메일을 쓰고, 읽고, 시를 짓고, 산문을 쓰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수를 놓고, 요리하고, 식사를 하고, 부엌을 치우고, 버질의 작품을 해석하고, 친구들과 만나고, 남편과 담소를 나누고, 장을 보러 가고,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여행할 수 있을 때 여행하고, 이따금 위파사나 명상도 하고, 이따금 영화도 보고, 기공 수련도 할 수 있을 때 하고,... 그 무엇도 여가 시간이 아니다.
나의 노년도 그러고 싶다. 80이 넘어 지혜를 담아 책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서점과 도서관과 창고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이 나온다 한다. 인류에게 더 이상의 책이 필요할까, 애꿎은 나무만 잡아먹는 거 아닌가?
이런저런 못 쓰는 이유를 대며 미루던 내 꿈, 욕망덩어리 혹은 소망을 돌아본다.
여전히, 어쩌면 유일하게 내려놓지 못하는 '책'에 대한 마음 말이다.
잠시 보류해도 되겠다는 핑계와 여유가 생기다. 이 책을 읽고 나서다. (‘이 분은 젊을 때도 많은 베스트셀러 책을 냈네...’라는 생각에 미치면서 의기소침하기는 했다.)
젊어 보이려 너무 애쓰거나 나이 듦의 연륜을 느낄 수 없는 이 시대 자기부정적 어른 말고,
육신의 아픔이나 세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부드럽게 나이 들고, 가능할 때까지 공부하고, 가진 것 나누고, 죽을 때는 흔적 없이 깔끔하게 지구를 떠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런 품위 있고 단아한 노년을 살고 싶다.
이런 노인이 되고, 그녀처럼 이런 글을 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거저 되는 게 아닌데, 지금을 살아야 해. 이게 우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