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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찬 Oct 25. 2024

4-4. 공존

긴 여정



공간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은 그날 그곳의 날씨가 어땠는지,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 다양한 요소가 모여서 만들어집니다. 중요하지 않은 요소는 없겠다만, 그중에서도 제가 주목하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순간입니다. 특히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은 익숙한 사람들끼리 보내는 시간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도시의 익명성을 활용하는 순간인 거죠.

당연하게도 모르는 사람은 무섭습니다. 모를수록 피하게 되거나 각각의 집단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부, 출신, 가치관, 하는 일, 취미 등 갖가지 배경은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 짓게 하는 재료가 되죠. 그렇기에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고 머무는 경험은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시간을 보내니, 말 그대로 '다름'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치학자 하승우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각자가 가진 차이와 다원성은 말과 행위로 세상에 드러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중략)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만 전면에 나타난다. 즉 순수히 함께함에서 나타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의식이 물질(공간)로 구현된다고 말합니다. 그 물질들 덕분에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죠. 저자는 모든 인간을 '개인'이라는 개념으로 여기는 개인주의를 예로 듭니다. "현대의 이상적인 집은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다. 어린이들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사적인 공간을 가져 최대한의 자율권을 지니도록 한다. (중략) 이런 공간에서 자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하나의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발상도 가능하겠죠. 내 방이 '나'라는 의식을 심어준다면, 공공 공간은 '우리'라는 의식을 심어준다고 말이죠.


읽거나, 쓰거나, 대화하거나, 먹거나, 걷거나, 연주하거나, 감상하거나...

모든 공간은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질서를 갖춥니다. 그래서 공공장소는 서로 배려하고 공존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자원입니다.



우리는 공간을 통해 '여유'라는 가치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널리스트 테레사 뷔커는 "다양한 집단과 세대가 함께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더 많은 공간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며, 이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시간적, 공간적 여유는 개인에게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죠.

여유는 경쟁심과 적대심에도 영향을 줍니다. 치열하게 임해온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노력과 지불에 대해, 자신이 누리고 있거나 누리게 될 것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란 쉽지 않겠죠. 생태철학자 신승철은 다른 존재를 타자화하지 않는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타자를 자신의 삶의 내부로 가져오는 것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면 들일수록 저는 풍부하고 다양한 ‘또 하나의 나’에 대해 눈뜨게 됩니다."라며 이러한 삶을 권장합니다.

저는 여기에 물리적 공간의 필요성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외부 존재를 내 안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리는 물리적인 공적 공간이 많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온전히 사적인 공간에 대한 성찰은 법적 최저주거기준 등에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공공 공간이 많아진다는 건 더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인간을 한 세계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공적 공간을 누리는 것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법철학자 마사 C.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에서 (특히 소설이 갖는) 문학적 상상력의 의미를 얘기해 줍니다.


소설은 다른 많은 서사 장르들보다 내적 세계의 풍부함을 훨씬 더 탁월하게 다루며, 수많은 구체적인 맥락 속의 모든 모험을 통해 삶이 주는 도덕적 의미까지도 구현한다. 이와 같이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환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제학적 방식에 철저히 반대하며, 질적인 차이들에 더 주목한다.


책이 많이 꽂혀 있는 책방이나 카페를 떠올려 봅시다. 야외도서관처럼 광장이나 공원, 개천도 좋습니다. 만약 이곳에 수험서가 가득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수능 학습지가 많으면 청소년을 위한 거고 자격증 문제집이 많으면 청년을 위한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런 공간에서는 특정 분야를 권하고 싶지 않고 권유받고 싶지도 않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무엇인지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은 공간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건축과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하지만 보이지 않던 존재가 더 많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질문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공간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거리에 쌓인 눈은 누가 치우고 있고, 지금 이 모습이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고 이 모습이 유지되기 위해 어떤 일들이 반복되고 있을까요?




공간을 주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편에 다다랐습니다. 1부에서는 감상을 하고, 2부에서는 평가를 해보고, 3부에서는 시민을 생각하고, 4부에서는 사회를 돌아봤는데, 결국 이 모든 얘기는 '공존'으로 가는 여정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끝맺음이 그렇듯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들은 많네요. 공부하고 표현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과정과 성과를 나눌 관계는 어떻게 형성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켜주는 제도와 문화가 정착되어 있을까...


여러 질문들을 또다시 남긴 채, 심리학자 폴 키드웰의 말로 마무리 짓습니다.


장소는 기억, 신념, 예술적 상징, 역사 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문화의 물결’과 풍경, 디자인, 자연 현상, 기념물 같은 ‘물질성’,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들과 그곳에서 겪은 경험과 같은 ‘사람의 흔적’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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