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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찬 Oct 25. 2024

4-3. 과거와 과정

수치로 쌓은 자리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투박하게 구분하면 점, 선, 면 중 하나가 되겠네요.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대세는 있기 마련입니다. 각각 장점이 있고 지역 특성에 맞게 배치되어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세 가지 형태 중 '선'에 해당하는 선형 공원이 갈수록 주목받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우수 사례로 언급되면서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경의선 숲길과 청계천이 아닐까 싶네요. 한국을 방문한 건축평론가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은 청계천을 보고 이런 감상까지 남깁니다. "11킬로미터가 넘는 청계천을 따라 눈높이로 쌓아 올린 돌담은 인간에게 풍부한 물질적 경험과 자극을 주는 휴먼스케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삶의 질을 높이려면 정서를 건강하게 해주는 적절한 인지 자극이 필요하다는 나의 연구 결과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증거인 듯했다."


구체적인 디자인도 물론 중요하지만, 선형 공원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형태 자체가 갖는 높은 접근성과 연결성입니다. (같은 면적을 가진 공간을 만들 때) 공간을 길고 좁게 늘릴수록 더 많은 지역과 접하게 되고, 한 지점에서 더 멀리 쾌적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즉 수치화를 통해서 강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앞에서 언급한 "11킬로미터", "눈높이", "휴먼스케일" 같은 단어도 결국 숫자입니다. 선형 공간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수, 사람들이 머무는 시간, 의자 수, 보행로와 광장의 면적, 주변 거주지 혹은 대중교통수단까지의 거리, 보행로에서 마주하는 1층 상점의 수 등 우리가 좋은 공간을 평가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는 바로 '수'입니다.


점(소규모 공원).


선(선형 공원).


면(대규모 공원).



그렇다면 공간을 평가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 이외에 우리는 '수'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첫째로, '이상적인 수치를 갖춘 좋은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공공건축을 연구하는 이영범과 염철호는 도로로 덮여 있던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시민위원회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절차의 합리성과 과정상의 민주적 합의가 매우 불만족스러운 단계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중략) 모든 것은 결과가 이야기한다는 시장 개인의 신념과 의지로 청계천을 덮고 있던 묵은 도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청계천 복원사업처럼 최종 결과물이 대중적으로 향유되면 과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이 우리 도시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관례가 되어버렸다.


둘째로, 이익을 좇는 '수'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이익이 최우선 가치가 될 때 무엇을 잃게 될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죠. 제가 주기적으로 꺼내 보는 어린왕자에서 주인공은 모든 대상을 숫자로 평가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 벽돌로 지은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가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20,000달러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제야 그들은 야, 참 좋은 집이구나!라고 소리를 지른다." 수치화 자체가 대상(혹은 현상)의 가치를 측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는 것이죠.

활동가 김윤영은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에서 대중이 향유하고 있는 공간을 통해 과거를 조명합니다. 여기서 소개할 사례는 경의선 숲길 지역의 아파트 재개발 사업인데,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비록 공원 조성 추진(2009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서울의 아파트 재개발이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죠. 분양가를 지불할 여력이 안 돼 (현재 경의선 숲길 동쪽 끝지점인) 신계동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숲길이 만들어지고, 그 아파트 가격이 치솟는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신계동은 2004년에 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2006년에 사업 시행을 인가받았으며, 2008년 관리처분계획 인가가 났다. (중략) 관리처분계획 인가가 난 이후에야 법원의 강제집행명령에 따라 철거가 가능하다. 그러나 신계동의 경우 이런 합법적 절차가 적용되지 않았다. 2004년 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직후부터 ‘재개발 조합’은 마구잡이로 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입한 땅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용역 깡패와 철거반을 투입해 가로등을 깨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빈집이 생기면 재빨리 무너뜨렸다. 그 결과 2006년쯤에는 주민 대부분이 지역을 떠났다.


저자는 경의선 숲길이 만들어진 이후(2016년) 인근 지가가 상승한 점에도 주목합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시 지가지수가 90.02에서 110.95로 오른 것에 비해 홍대입구역 지가지수는 72.69에서 170.37로 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은 공간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갈수록 심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갈등도 세지겠죠. "공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지만 경의선 숲길처럼 땅값이 비싼 도심에 위치한 경우 인근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첨예하게 가른다."


만들어질 모습뿐만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공적 공간으로 기능하는 장소에서 공공성을 상실한 과거를 발견할 수 있는 묘한 현실입니다.



사라질 뻔한 공공 공간을 시민들이 지켜낸 사례도 있습니다. 건축가 황두진은 『공원 사수 대작전』에서 통의동 마을마당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97년 초 한국 최초의 공공 마을마당으로 조성된 이곳은 2016년 청와대가 민간에 매각했고, 결국 소유권도 넘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대책위를 구성한 후 청와대, 의회, 서울시, 종로구 등에 민원을 제기하고 공론화, 서명, 행사 등 다양한 시민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18년, 이 노력의 결과로 마을마당은 도시계획시설(공공용지)로 지정되었고, 다음 해 이 땅을 매입한 서울시로 소유권이 이전됐습니다.

물론 소유를 누가 하는지보다 중요한 건 다수가 공유하는 의식과 문화겠지만, 이익을 좇는 강력한 힘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안전망은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2020년 시행된 ‘공원일몰제’(도시계획시설인 공원으로 지정되고도 20년이 지날 때까지 조성사업이 진행되지 않은 곳은 공원 지정이 해제되는 제도) 역시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있죠.


놀랍게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을마당•쌈지공원•자투리공원 등은 그 상당수가 법적인 공원, 즉 도시계획시설이 아니다. 즉 임의로 지정하고 해제할 수 있다. 그만큼 개발의 유혹이 많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라질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공원은 시민의 일상 속으로 깊게 들어와 있을수록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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