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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Oct 15. 2023

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방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5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새러 티즈데일, <연금술>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내게 가르쳐 줄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내가 숨어 있는 벽을 허물고 나를 해방시키고 나를 다시 살린 것 같았다. 그 기쁨에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하고.


하지만 멘토와 마주 앉기까지 갈등이 따랐다. 만남을 자꾸 미루고 싶었다. 학교 선생님들과의 만남에 늘 적용되던 생각이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과 별로 다른 게 없다면 만남이 서로에게 기쁜 일이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만남을 미룬다면.


단언컨대 그 사람은 완벽주의자. 틀림없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게 제일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남의 생각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부족하게 여기면 자신을 가두게 된다. 완벽이라니. 맙소사. 그러니까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멘토를 만나지 않으려 했구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참으로 어리석다 하는 소리를 들은 날이 있었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소리를. 누군가를 배우려면 그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좋은 게 없다는 말. 어디서 들었는지 보았는지 모르는 말이 떠올랐고. 용기를 한번 내보자는 마음이 따라서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한 줄 편지를 보냈다.


“일정한 날 선생님에게 멘토링받을 수 있을까요? 화초에 물 주듯이.”


“원하는 날 언제든지요.^^”


한 줄 편지를 보내니 한 줄 답장이 왔다. 그를 만나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글로 써보았다.


사실 이 자리에 앉고 싶었죠. 진작에……. 멘토를 만나러 오는 것조차 자연스럽지 못해서 놀랄 지경이에요. 스스로 자신에게 일신우일신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어서인가 봐요. 그렇지 못하다 생각될 때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어 만남을 미루게 되거든요. 고맙게도 멘토가 생겼는데 어떻게 소통을 해야 변화에 속도가 붙을까요? 멘토 활용법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준비한 말을 하자 그는 자기 멘토인 K박사의 멘토클럽 방명록에 매일 글을 올렸다고 말했다.


“매일 멘토에게 할 말이 있나요?”


“목표가 있으면 할 말이 많은데 왜?”


그는 멘토클럽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멘티들이 방명록에 쓴 글을 읽어주었다.


“멘토한테 저런 거까지 말해요? 웃긴데요.”


웃지도 않고 내뱉듯 말하고서야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마음속은 모르지만 동요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보고 조금 안도했을 때 그가 말했다. 매일 새벽 편지 쓰기를 해보라고. 멘토클럽 사람들이 하듯이, 그 자신이 했듯이.


매일? 편지 쓰기를? 아, 나는 편지가 꼭 필요한 경우에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까지 미루다가 겨우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차치하고 일단 쓰기가 두렵고 부담스러운데. 그걸 어떻게 매일 하지?


속으로 생각하지만 하늘의 해처럼 그것은 다 보인다. 나는 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 아닌가. 진료를 받을 때 그는 내게 표정만 봐도 알지,라고 말한 적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얼굴이 말해버렸을 것이다. 매일 방명록에 글을 남기다가 이제는 비정기적으로 K박사에게 메일을 보낸다고 그가 말했다.


가슴은 답답하고 변화의 방법은 모색하고 싶고 해서 나는 또 물었다.


“무엇이든 미루지 않는 습관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루지 않는 습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것 말고는 없어요. 단순함이 필요할 때가 있죠.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닌가 싶네요.”      



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방. 그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리라. 남이 믿어주더라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기 안에 신적인 힘이 있다 한들 발휘할 수가 없다. 자명한 이치를 알고 있지만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나도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이 해낸 때가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 해낼 것이라는 다짐도 없이 열정으로 오직 할 뿐이었다. 하는 행위 자체가 자기 확신의 표현이었으니까.


하지만 자문하던 당시 마음이 시달린 것은 내가 안 될 것이라 미리 짐작을 해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미 생각이 그렇게 정해져 버리면 몸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안 되는 쪽으로 작용을 한다. 멘토는 I can do it!이라고 자신에게 속삭이고, 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하라고 했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암시를 하는 이유는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자기 암시로 잠재의식을 바꿔보려고 했으나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았다. 아직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사소한 일에서라도 성취감이 뒷받침되어야 자신감의 싹이 자라날 텐데. 무엇을 보태야 할까.


내 의지력이나 실천력이 작심삼일에도 못 미치는 즉흥적 수준이어서 시간은 흔적 없이 지나가고 자꾸 한숨이 나와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달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 가에서”(김수영, <채소밭 가에서> 일부분) 읊조리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멘토클럽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K박사의 멘티들은 날마다 새벽에 기상해서 방명록을 쓰는 것을 습관처럼 하고 있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좌절감을 느낄 때 성취감으로 일상을 일구는 그들의 흔적을 목격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혼자 하면 쉽게 나태해지지만 누구와 약속을 해두면 그 약속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긴장하게 되리라. 결국 성취의 빈도도 높아지고 그만큼 자신감도 커지고. 그러니 멘토가 나에게 새벽 편지 쓰기를 권했구나 하고.


승패를 지켜보고 나를 응원하는 눈이 있으면 습관을 바로 잡고 일상의 도전에 더 많이 성공할 터이니 나는 그제야 그를 나의 관객으로 초대했다. 내가 나를 이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 그가 축가를 부를 수 있도록.      


“해가 떨어지고 하늘 전체가 분만의 흔적이 자욱할 때, 저 역시 자신을 이기고 자신을 낳는 승리의 노래를 날마다 부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새보다 늦게 일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신영복, <처음처럼>)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다 근래 멘토클럽 홈페이지를 보다가 불현듯 깨달았다고 할까요. 어째서 멘토클럽 사람들이 날마다, 그것도 새벽에 방명록을 작성하는지를. 제 언행이 포장하고 있는 것이 오만함이라는 것까지도. 그들을 비웃었으니 말입니다.


속으로 비웃은 이들의 작은 행위가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은 일이 실은 작은 일이 아니었네요. 한 걸음이 천 리를 가고 한 삼태기의 흙이 산을 만드니. 한 걸음이 부족해도 천 리에 이르지 못하고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도 산이 되지 못하니, 큰일을 결정짓는 것이 작은 일이었네요.


해가 떠오르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날마다 선생님께 편지를 쓸까요. 아,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한 번 해볼까요. 아니요, 할게요. 그냥 할게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새로운 기운이 감도네요. 愚公移山의 기적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흙을 옮기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자신감은 자신을 이겨야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행하고 얻은 나머지이니, 새벽마다 자신을 낳을 준비를 착실히 해야겠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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