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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Oct 19. 2023

오늘은 벼랑입니다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6

“아주 큰 깨달음을 하셨습니다. 한 걸음을 그냥 떼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 참 어려워하거든요. 그냥 내딛으면 되는데.^^ 그리고 한 걸음이 천리가 되고, 한 삼태기의 흙이 산을 만들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고, 흙을 옮기면 어느새 천리가 되고, 산이 되죠. You can do it!”


그의 답장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하루를 맞는 의식처럼 행한 새벽 편지 쓰기. 그것은 나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짓이었다. 확고한 산의 부동심과 무엇도 감수하며 흐르는 물의 지혜를 체현하여 자신을 전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마디만 써도 괜찮은 것. 발 앞에 징검돌을 하나씩 놓으며 나에게로 건너가는 듯한 새벽 편지.


내 편지를 받은 그는 나를 응원했다. 믿음으로. 내가 해내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을 향해서도 그와 같은 마음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았다. 그의 답장 끝에 붙는 말. You can do it!


격려(encouragem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심장(cor)에서 나왔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심장을 준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진심을 준다는 의미. 그가 전하는 진심의 진동 속에서 내가 돌려주는 메아리는 I can do it! 자신의 전부를 데리고 오늘로 들어가리라 다짐하면서.


“오늘은 벼랑입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해야겠어요. 그래서 다 이루고 달팽이처럼 움츠러든 정신을 펼쳐야죠.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물러서는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한 나를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벼랑에 세우고. 편지에 쓴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나는 한없이 뒷걸음질을 칠 것 같아서. 말과 글이야말로 현실의 씨앗이고 곧 기도이니까.

 

혼자 쓰고 다시 읽어보지 않는 일기와 달리 편지는 믿음으로 파이팅을 하는 말이어서 손으로 옮기는 말이나 눈으로 들어오는 말이 기운이 되었다. 때로 나에게 박수 받지 못한 점이 그에게 박수를 받았고, 내가 단점이라 여긴 점을 그는 장점이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하면 나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가령 내가 ‘집착’이라고 여기는 것을 ‘집중’으로 바꿔주어 나를 새롭게 보게 했다.


“평소 소심하다 싶다가도 종종 대담하다 싶습니다. 하나에 집착하면 그 밖의 다른 일에 소홀하게 되는데,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하루 이틀 지나 알아차려서 정신건강을 의심할 정도로 엄청난 일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집착이 아니라 집중이고요. 그만큼의 집중력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중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어요. 초집중할 수 있는 집중력이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자산입니다.”


멘토라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지게 되면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은 서서히 수정되고 있었다. 새벽 편지 쓰기를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다가 또다시 미루고 고집하다 시간을 지연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에게 당부했다.


 “선생님이 옳았습니다. 결국에는 선생님 말씀을 따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잃어버린 시간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도움이 되는 말씀을 금방 알아듣고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의식 상태가 그 정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번에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단번에 소용없다 여기지 마시고, 한 번 더 말씀해주시면 의식은 돌연 깨어날 수 있으니, 거듭 강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진작 새벽 편지 쓰기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마음과 생활이 정돈되어 가는 좋은 느낌입니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틱낫한,『화』)라는 것을 깊숙이 새기고 행동을 민첩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매일 편지를 쓰면서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 멘토링을 받기로 하고는 내가 아무 말 없이 약속을 어긴 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책을 하면서 각성을 요구한다고 여겨 물어보았다.


“멘토는 질책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아요. 항상 기댈 수 있는 큰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는 거고. 멘토링을 받는 사람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 나무와 소통하면서 스스로 변화해 가는 거예요. 멘토는 그 변화의 계기를 줄 뿐이죠.^^”


곧고 바르게 하려고 먹줄을 치듯이, 개과천선을 위해 충고하고 비판하는 게 필요한 줄 알았으나 그와 소통하면서 거울을 생각하게 되었다. 비춰보는 자 스스로 자신을 정돈하게 하는 거울.


멘토링을 받기로 한 날. 멘토가 말했다. “오늘 5시 온다고 하셨죠? 나중에 봬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편지에는 그 문장뿐이었으니까. 그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여 그 문제에 골몰하다가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편지를 썼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대추 한 알>     



“땡볕만이 아니라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초승달이 모두 있어야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고 여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초승달이 땡볕과 똑같이 유익합니다. 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닥치고 있는 시련까지도! 가장 유익한 자양분이니까요. 모든 일에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외적 요인을 인정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내적 요인에 초점을 맞춥니다.”


기대는 충족되지 않는다. 실망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나를 배반하는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 줄 모르고 타인의 반응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닭은 자기애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자신을 이해하는 만큼 남을 이해할 수 있으니 자기애가 클수록 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가슴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예기치 못한 일로 내면의 소란을 겪을 때면 나 자신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일이 모든 것의 관건이라는 걸 절감하곤 했다. 일이나 관계나 다 자기애를 반영하므로.     



그때까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굳은 의지라고 생각하여 일기에 이렇게 썼다. “꿈은 극기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극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절실한 소망이다. 절실한 소망에는 불굴의 의지가 수반된다.”


기어이 해내려는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때. 자기 불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나에게 속삭여야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백팔배를 할 때도 염불 하듯이 나는 할 수 있다. 날을 이어서 그렇게 하던 날 나는 나에게 미안하여 두 팔로 나를 안고 얼마나 통곡했던가. 나를 믿지 못했으니. 울다 보니 깊은 울음이 나왔고, 내 목소리가 귀에 설었다.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나에게 애원하는 목소리. 내가 알아주지 못한 탓에 나는 얼마나 외로웠을지.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반드시 해낸다. 나는 해낼 수 있다.”


나를 짓밟은 내가 참회한 날들이 지난 후. 어느 날인가 늘 하던 대로 기도를 하는데 나는 할 수 있다 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지만 결의를 다지는 그 말에 어딘가 불편해지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번에는 가슴에 대고 내 안의 나에게 말해보았다.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께 다 내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하자 이내 심신이 부드러워지면서 눈물이 고요히 흘러내렸다.

 

그 후 현실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기도를 그만두었다. 나를 고집하는 마음이 사라져야 내 안의 위대한 존재가 현현되니. 애초 나를 불신하던 마음이 그렇게 내 안의 나에게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 무렵 한 학우를 알게 되었다. 그도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나이가 나보다 두어 살 많은 그는 나를 선배라고 불렀다. 그 호칭을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와 교류가 별로 없어 사실 그렇게 불리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그는 시인과 명상가를 꿈꾸는 사람으로 영적인 성장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관심사가 나와 비슷한 줄 몰랐다. 월악산 자락으로 답사를 가기 전까지.


답사 일정을 나는 처음부터 함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논문 발표 시간에 맞춰서 내려가기는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날 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초 예정보다 발표일이 한 달이나 미뤄졌는데도 그동안 준비한 것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파일함을 뒤져 묵혀둔 것을 가지고 발표했으나 인정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물이 갑자기 충족감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내게 참다운 기쁨이란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어서.


남모르는 미진함에 나는 좀 부끄러웠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이리 와하고 말하는데도 선뜻 가지 못하고 내 옆에 앉은 그 학우하고 둘이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뒤풀이가 끝난 후 모두 잠든 새벽에 나는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첫 차를 탔다. 뒤늦게 왔으니 이후의 일정은 함께하겠지 남들은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왜 그리 서둘러야 했을까. 거기 갈 때부터 그렇게 작정하고 갈 정도로.


여유라고는 없는 그 마음이 안쓰러워 나는 나를 안아주고 싶다. 어디서도 그 시절의 내 모습은 찾을 수가 없고. 지금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책상 옆 벽에 붙여 둔 사진을 바라본다. 그때보다 한두 해 전의 내가 미황사 대웅전 앞에서 웃고 있다. 삼사 순례를 떠나는 엄마를 따라 간 해남 미황사. 밤새 기도를 하고 절 마당으로 내려선 내 뒤로 달마산이 펼쳐진 그곳.


무엇을 위해 혼자 대웅전에 남아 날이 새도록 기도했을까. 그 밤에 무서움을 무릅쓰고. 법복을 입고 웃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묻고 싶네. 그 밤의 기도나 새벽에 첫 차를 타고 돌아온 마음이나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니 서울에 도착해 집으로 오는 도중 들린 서점에서『18시간 몰입의 법칙』이라는 책 제목에 끌렸을 테지. 서가 앞에 서서 읽는 내게 큰 자극을 준 책. 끝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왔을 때 나보다 먼저 도착한 마음을 발견했다. 바로 그의 편지를.


“제 아픈 이야기 따뜻하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본디 학문적 꿈에 대해서도, 찬찬히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신 분은 선배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편지를 읽으면서 문득 그 책을 그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나만큼 힘들게, 어쩌면 내가 헤아리지 못할 만큼 힘들게 그 시절을 통과하려고 애쓰는 그에게. 어쩐 일인지 이메일 하단에 주소까지 적혀 있었으니,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마음을 담아 책에 동봉할 편지를 한 줄 쓰기 시작했다.


“Y씨가 꿈의 나래를 펼치면 장관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 뜻을 꺾지 않는 한 누구도, 무엇도 그 뜻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서점에서『18시간 몰입의 법칙』을 읽었어요. 혹시 읽으셨나요? 이 책이 주저앉은 마음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사람은 자신이 상상하고 믿는 대로 된다고 하지요. 세상은 상상과 믿음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라 하고요. 한없는 두려움과 슬픔이 머무는 자리에 다시 꿈과 희망을 불러오기를. 그리하여 소원을 반드시 이루시기를. 응원합니다. 함께 노력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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