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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Sep 23. 2023

시 같은 혼잣말이라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4

손을 꽉 쥐고 있었다. 형통은 내 손에 달렸다 생각했다. 그러나 도처에서 도움을 주려는 손길이 내게 닿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내가 손을 펼치고, 자신 속에서 거듭 난 이가 손을 내밀 때 어두운 마음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당신으로 인해 눈앞에 닥친 패배와 곤경과 비난이 나의 성장을 돕는 기회임을 알았습니다.”(존 스미스,『포옹』) 이렇게 말할 날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소통하는 데 서툰 터라 멘토링을 어떻게 받는지 알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멘토가 쓴 칼럼과 조찬 세미나에 초대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나의 멘토이지만 자기 계발서를 내고 강의를 하는 저자의 멘티였다. 그의 멘토는 멘티들과 온라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뿐만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조찬 세미나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자신의 멘토를 만나는 조찬 세미나에 참여하도록 권한 것이다.      


죽은 가지에 새순이 돋으려는지 나무 안은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유폐시켜 요지부동이던 얼음호수는 녹고 있고요. 바람을 맞이하며 거리로 나가고 싶어졌어요.      



짧은 편지를 그에게 보내고 겨울 이른 아침 세미나 장소에 도착하니 정장 차림을 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출근 전에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멘토도 병원 간호사들과 함께 와 있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멘토에게 소개했다. 그의 멘토는 알려진 사람이므로 나는 그의 이름은 알지만 그때까지 자기 계발서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단지 멘토가 보내준 송구영신의 자세에 대해 쓴 그의 칼럼을 읽었을 뿐이다. 가령 이런 문장을 기억했다. “새로운 계획을 세웠으면 ‘slow and steady(느리지만 꾸준하게)’ 거북이처럼 전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뛰다 자만하면서 쉬는 빠른 토끼보다 느리지만 꾸준한 거북이가 이기는 법이다.” 내가 그에 관해 아는 거라곤 그게 다인데 그는 처음 보는 나를 보자마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 표정으로,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그가 보여준 말 아닌 말에 감동하여 내가 그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것은 어떤 말보다 다정한 태도이다.


아무튼 그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속에서 그가 나를 귀하게 대하니 내가 굉장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을 순간적으로 느꼈는데, 이후 나의 멘토는 내가 박사에게도 조언을 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박사와 온라인으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멘토 클럽 홈페이지와 전화로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는 정말 어떻게 하면 내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애쓰고 있었다. 그를 비롯해 내가 만난 인연들을 징검다리로 다가가고자 하는 궁극의 사람은 바로 나였다. 참다운 나를 드러내는 것. 내게 성공이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듯이.     



그날 만난 성공자들의 공통점은 위험을 안식처로 삼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사람이라는 사실을 세미나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고,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그 자신을 곤궁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이루지 못하게 한다. 이는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능하지 못한 일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맹자가 말한 대로 하늘의 시험은 큰 사람이 되는 통과 의례지만, 누구나 큰 사람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에 있다 생각됩니다. 동굴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 어쩌면 그것이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니 스승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스승에게 다가가지 못하니 공부의 진척이 더딜 수밖에 없었겠지요.


옛사람들은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으면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친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스승과 제자가 하나로 만나고 그 구분이 사라지는 師友 관계를 강조했는데, 스승과 친구가 하나 되는 사람이 바로 멘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불현듯 드네요. 멘토와의 관계를 통해 다른 사우 관계들을 더 좋은 친밀함으로 이어갈 수 있겠죠. “사람이 어둠 속에 살면서 그 속에서 친구를 얻는다면 어둠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 옛사람의 심정도 절로 알아지는군요.


멘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승을 대하던 태도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변이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별일이 없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제게 시간을 내주니 고맙고 선생님께 참으로 소중한 분을 소개해주셔서 또 고맙습니다.


의사에게조차 자신을 조금이나마 공개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듯이 박사님께도 선뜻 다가서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소통하게 될 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만나서 반가웠다 하시며 제 손을 잡고 하신 말씀은 기억나지 않는데 제가 감화된 것은 사람을 대하는 자세, 사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K박사님을 닮았다는 것도 그날 알게 되었답니다.


저는 저를 향해 갈 것입니다. 저를 기쁘게 하고 저에게 부끄럽지 않고 저를 추종하고 싶지요. 참다운 저를.     



내가 미소 지을 때

그대는 나를 통해 미소 짓는다


내가 눈물 흘릴 때

내 속에서 그대는 눈물을 흘린다


내가 잠에서 눈을 뜰 때

그대는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내가 길을 걸을 때

그대는 나와 함께 있다


그대는 나처럼 미소 짓고 눈물 흘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길을 걷는다


나는 얼마나 그대와 비슷한가

하지만 내가 꿈을 꿀 때에도

그대는 깨어 있다


내가 넘어질 때

그대는 똑바로 서 있다


내가 죽을 때

그대는 나의 생명      


요가난다, <내 안에 계신 그대>     



나는 비록 무지하고 부족해도 내 안에 계신 그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에 내가 구하기만 한다면 나를 인도할 수 있으나 나는 그 존재에게 뜻을 묻지 않고, 내 안의 소란 속에서 결이 다른 그의 목소리를 언뜻 듣기도 했지만 귀 기울이지 않고, 내 고집대로 하면서도 나를 불신했으니. 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함께한 내 안에 계신 그대는 얼마나 슬퍼했을 것인가.


언젠가 김남조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는데 눈물이 흘렀다. 내가 나에게 하는 사랑 고백 같았다. 때로는 내가 내 안에 계신 그대에게. 또 때로는 내 안에 계신 그대가 나에게. 어떤 경우에는 한 연씩 번갈아 서로에게 고백하는 것 같은 편지. 내가 받고 싶은 편지. 날마다 나에게 읽어 주고 싶었다. 읽을 때마다 울었다. 자신에게 사랑받는 기쁨에. 그토록 나를 배반한 미안함에.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편지>     



그러는 사이 한동안 나가지 않던 공부 모임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안에서 껍질을 쪼는 병아리는 밖에서 함께 껍질을 쪼아주는 어미 닭이 있어야 부화할 수 있는데, 때가 되어도 병아리가 미동조차 하지 않으면 어미 닭은 애가 타지 않을까. 어미 닭처럼 알게 모르게 나를 기다린 고마운 이들을 만나러 가서 긴장했으나 아무도 질책하지 않았다. 도리어 손을 내미는 마음에 나는 자신에게 속았다는 것을. 지난날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말의 힘 덕분에 자연스레 일어난 일이었다. 책상 유리 밑에 넣어둔 멘토의 비결이 담긴 종이에서 죽도록이라는 글자 다음으로 악순환이라는 글자가 보였던 것이다. 내가 멘토에게 내가 나를 가둔 상황을 말했을 때 그가 한 말은 악순환이라는 글자에 담겨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그 순간에는 내면에서 저항했으나 귀로 들어간 말은 가슴을 뚫고 들어가 기어코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 내고 마니, 인생은 말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나에게 가장 많은 말을 해주는 사람은 나 자신. 내 안에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가 나에게 사랑을 채워주는 시 같은 혼잣말이라면 이제는 내가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허물을 벗고 진화를 욕망하는 사람. 그 곁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괜찮다. 그는 경청과 공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할 테지만 경청과 공감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닿을 수 있어야 하니. 말 속의 말은 그때 흘러나오니. 주저앉은 이의 가슴에서 말 속의 말이 흘러나온다면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세상 속으로 흘러들 수 있다.      



날마다 <편지>를 나에게 읽어주던 날 맞은 새해. 소식이 뜸한 이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기 좋은 때이므로 나는 스승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나도 한 학생에게 편지를 받았다. 내가 수업하는 교양과목을 한 학기 동안 수강한 학생. 그는 대학원에 합격하고 나를 한번 만나고 싶어 했으나 나는 그때 누구와의 만남도 가능한 피하고 있었다.


부탁에 응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 그 학생이 생각나곤 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벌써 학기를 마치고 논문을 준비하는 시점이라고. 정작 나를 필요로 할 때 도와주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는 내게 안부 편지를 보낸 것이다. 자신 없지만 하는 데 까지 해보려 한다고 맺은 편지를. 그 무렵 나도 학위 논문을 썼으니 그 학생의 부담감을 알았다. 나처럼 자신감 없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내가 더욱 알기에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할 일은 망상 속에 감추어진 신을 숨 쉬게 하는 일이지요.『The secret』을 읽다가 이렇게 메모했어요. “여름이 가을로 번지던 날, 그대를 배신한 죄를 참회하였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가 없었다.’ 과일들이 완성되고 낙엽이 흩날리던 날, 나는 그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지없이 순종하고 싶은 그대는 내 안에 계신 나.” 늘 기억하기를. 비할 바 없이 위대한 존재가 자기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해낼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무한하다는 것을. 그 믿음으로 끝까지 가요.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끝없는 존재이기에.     



그 학생에게 한 말은 사실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주는 말이 나는 절실했다.


언젠가 읽은 적 있는 글이 떠오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구걸하는 여인에게 동전이 아니라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더니 그 후 여인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 자리에 앉아 구걸하는 것은 자신을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릴케가 동전으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마음을 전하자 구걸하는 여인은 자신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사랑받고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지도.


우리 자신이 누군지 알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모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이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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