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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Aug 13. 2023

그믐밤 같은 한 시절을 지나며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2

침을 놓으러 간 의사는 이윽고 원장실로 돌아왔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 화면을 내가 볼 수 있게 돌리고는 자기 블로그를 열었다. 흔들리는 청춘들이 마음을 추스르고 꿈을 향해 돌진하도록 응원하는 글이며 불우한 아이들을 후원하기 위해 기타를 연주하는 사진들을 나는 보았다.


그믐밤 같은 한 시절을 지나며 오직 자신에게 의지한 자가 아니면 발산할 수 없는 빛이 어디까지 비추는지 둘러보는 동안 내 눈은 토끼 눈처럼 커졌다. 그때 내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디일까 늘 생각한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의 빛 속에서 점점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 대화의 흐름에 이상을 감지했다. 그가 좀 주저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끌어주려 하고 있어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뜻밖에 나를 도우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등장한 순간 나는 그와 나 사이에 펼쳐진 종이, 그 위에 그가 쓴 글자들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좋은 의도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용기가 필요했을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을 두드린 그의 말은 내게 찾아온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나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묵묵히 있었다. 이끌어준다는 말이 막연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그의 선의만은 알 수 있었으므로 감사한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그렇지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니 그는 내 마음의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노크하듯 이어서 말했다.


“성공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 말을 들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하고 혼자 생각했던가. 나는 계속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자진해서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미동하지 않는 사람을 보며 그는 안타까워했을까, 자신의 호의가 방향을 잃고 빙글거리는 데 어지러웠을까. 아무튼 그는 끝까지 나를 응원했는데, 마지막에는 파이팅! 하고 외치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처음 본 순간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웃음을 지으며.


어금니까지 보이도록 해맑게 웃으며 그가 손바닥을 내게 보이고 있었다. 쫙 펼친 그의 손바닥에 손바닥을 맞추듯 갖다 대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닿아 탁 소리를 내는 순간 나는 고개가 절로 왼쪽으로 살짝 젖혀졌다. 작은 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마음이 속삭이듯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


한마디 말을 남기고 뒤돌아 문을 열고 나왔다. 한 사람이라는 세상 밖으로 나는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며 한 생각들이 구름처럼 흩어져버리고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기억해 낼 도리가 없지만 짐작컨대 그때 나는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정신이었으리라. 이유 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난 게 꿈만 같았으니. 꿈을 꾸듯 그를 마주한 순간이 내 안에서 재생될 때면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1>(용혜원)이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대를 만나던 날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들을

웃는 얼굴로 잘 들어주고

어떤 격식이나 체면 차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솔직하고 담백함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 같아

둥지를 잃은 새가

새 둥지를 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을 함께

맞추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사람입니다   

  


혼자 앉아 있으나 때때로 맞은편에 그가 앉아 있었고 그가 내게 한 말들이 들렸다. 그러는 사이 깨달았다. 그가 내게 건넨 말의 의미를. 그의 인생 기복의 의미를.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 반드시 마음을 괴롭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하며, 하는 일을 어긋나게 만들어서 시험하니, 하늘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접속하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기도 하리라는 것을.


공부를 계속했으면서도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증이 꿈틀거렸고, 그 물음에 서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을 때,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넘어진 나를 일으키고 내 일을 성사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자 느닷없이 알거나 모르는 전부가 고마웠다. 모두 협력자이고, 다 최고의 타이밍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어진 이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면 남을 성취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어진 이를 만났구나 싶어 느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수많은 생명을 제 안에 살게 하는 바다처럼, 세상 사람을 끌어안는 마음을 지니려는 사람에게 접속하고 싶었다.


지갑에 넣어 둔 그의 명함을 꺼내보니 거기에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와 연결되고 싶으면서도 전화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전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누구에게 전화하는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메일을 보내기는 해야겠는데 뭐라고 써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좀 걸으면 떠오를까 싶어 일단 산책을 나서보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입을 뗄 말을 찾지 못했다.


어물거리고만 있다가는 아예 시기를 놓칠 것 같아 메일 쓰기를 클릭하고 하얀 화면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문득 스쳐가는 생각들. 이지러진 달이 차오를 만큼 시간이 흘러 많은 사람을 만나는 그가 어쩌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지. 생뚱맞게 연락하는 이때 필요한 건 위트가 아닐까. 그래. 전화하기 어려우니 <전화>(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를 보내보자.      



“오늘 이곳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어 나갔었지요.

한 시간쯤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

한 송이 꽃을 찾아 머리를 기댔더니

당신의 말씀이 들리는 거예요.

그럴 리 없다는 말씀 마세요. 들렸다고요.

당신은 창틀의 꽃에 대고 말했지요.

하신 말이 생각나나요?”      


“무슨 말이 들렸는지 말해 보세요.”     

 

“꽃 한 송이 찾아서 꿀벌은 쫓아내고

머리를 기댔지요.

꽃줄기 손에 잡고

귀 기울이니 그 말이 들리는 거예요.

뭐라고 하셨나요? 내 이름을 부르셨나요?

아니면 혹시 하신 말씀이-

누군가의 ‘오세요’라는 말, 머리 숙이고 들었다고요.”      


“그런 생각은 했을 테지만, 말은 하지 않았어요”     

 

“하여간, 그 말 듣고 찾아왔어요.”      



이렇게 <전화>를 옮기고 나자 이제는 입을 열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싶어졌다.      


“벌레 먹어 두 해 동안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던 나무 가지 끝에 맑은 향기가 번지는 변화의 조짐을 남몰래 음미하다가, 솟구치는 대나무를 동경하게 되었지요. 대나무는 꽃 피는 마을까지 백 년 걸리는 여행을 한다 했지요. 푸른 칸칸 구석구석에 스친 바람과 밀려든 햇살이 숨결이 되어 구름을 능멸하며 하늘로 오를 수 있다 했지요.


침묵하고 있던 가슴이 입을 열기 시작하네요. 꽉 쥔 손이 서서히 펼쳐지네요. 활짝 펼친 손으로 발치에 앉은 저를 인도하시기를. 그리하여 제 마음과 생각과 행위가 진보하기를. 망상 속에 감추어진 신이 숨 쉬기를. 이를 통해 서로 영혼의 고양감을 느끼기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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