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롭 Jul 23. 2023

손은 마음의 문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1

잠에 취했다. 하루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꿈을 꾸는 듯 깨어 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더 이상 눈이 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눈을 꽉 감았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으니. 


밤낮없이 자다 보니 새벽에 깬 날. 아직 사람 없는 동네 골목길을 혼자 걸었다. 눈길을 비추는 가로등 주황 불빛이 유난히 따스하고 은근하게 보였다. 뽀득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눈 위를 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얼어붙은 마음 밑바닥에서 하얀 마음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글을 쓰고 싶다는 소리로. 쓰기가 두려워 한 줄에도 물러섰는데. 논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이었을까. 그 소리는.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 잊어버린 그때. 예전에 쓴 논문을 뒤적거리곤 했다. 부끄러워 읽고 싶지 않던 글을 다시 꺼내 읽을 때마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논문을 어떻게 썼지? 자문하면서. 기억해 내려고, 과거의 나에게 배우려고 학회지를 자주 펼치는 바람에 내 글 부분의 책배가 닳아 색이 변하고 있었다.  


내 글이 내가 쓴 게 아닌 듯 생경하고 아무래도 어떻게 썼는지 알 수 없으므로 물어볼 만한 사람을 만나면 붙잡고 공부하는 법, 글 쓰는 법을 물었다. 진실로 궁금했다. 계속 공부한 사람이 그런 걸 물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마음이 침묵 속에 오가기도 했을 것이다. 지도 교수는 떠났지만 끝까지 해보려 한 때.     


 

우선 건강부터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벼르다가 찾은 곳은 한의원. 존재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 심장이 닫힌 문 앞에서 힘차게 뛰었다.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매사에 긴장하기 일쑤지만 더욱이 낯선 세상 속으로 막 들어갈 참이었으므로. 닫힌 문 안에 한 사람이라는 세상이 있었으니.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문재, <어떤 경우>)이니까. 


한 세상의 경계에 나는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안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와 나는 만난 적 없지만 내가 문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우리는 마주하게 될 터. 그도 나처럼 긴장했을까. 밖에 있는 이가 들어오길 기다릴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었을지 모른다. 기다리는 사이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을 주려고 의도했을지 모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사진을 찍는 듯이 문 앞에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그러자 누가 나에게 미소를 지어준 것처럼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상태로 문을 살며시 열었다. 아니, 정면에 보이는 의사가 활짝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찬란한 그의 표정에 놀라 세상에, 저렇게 웃는 사람이 다 있구나 생각하며 휘영청 뜬 달을 올려다보듯, 파란 하늘 아래 흰 목련을 보듯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작은 눈은 입이 벌어진 만큼 더 작아져 감은 듯 뜨고 있었지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서 흘러넘치는 큰마음을 느꼈다. 한마디 말이 오가기 전에 환자를 향해 더할 나위 없이 환한 웃음을 웃는 의사라니. 의사만이 아니라 만난 사람 중에 그런 표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나는 언제 그처럼 웃었더라? 지금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생각에 잠길 만큼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희귀한 순간을 선사한 의사가 지어준 한약을 먹고 몸도 가볍고 머리도 가볍고 기분도 좋고 그래서 이제 살맛 난다, 하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한약을 먹은 후 변화가 너무 신기해 두 번째 한의원을 찾았을 때 의사에게 먹을수록 기뻐지는 한약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진맥을 하려고 양손을 책상 위로 내밀었다. 주먹 쥔 손을. 


언제부턴가 나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늘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의사는 그날 자기 검지와 중지를 내 손목에 선뜻 대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 쥔 내 손이 심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주 앉은 의사는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 끝을 움켜쥔 내 양손 각각의 손가락 끝에 조심스럽게 맞췄다. 손가락 끝으로 오므린 내 손가락을 이끌었다. 내 손가락은 그의 손가락에 닿은 채 서서히 일어났다. 손가락이 다 일어나 허공을 향하자 그는 내 손에서 손을 떼었다.


내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펼친 잎에 손을 대면 잎을 오므리는 미모사를 신비롭게 지켜본 적 있는데, 의사와 환자로 마주 앉은 우리는 미모사 잎을 보듯이 내 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건드리면 잎을 접는 미모사와 달리 내 손은 펴지고 있었다. 내 손이 펴지자 손바닥 위에 그가 손을 얹었다. 양 손바닥으로 양 손바닥을 쓸어내려 손을 쫙 펴주었다. 


손이 마음의 문인가. 손바닥과 손바닥이 닿자 가슴이 입을 열었다. 변화를 갈구한 나는 체력이 떨어지면 실력도 떨어진다는 말을 꺼냈다. 그 순간 보았다. 그에게서 새어 나오는 빛을. 알려주고 싶은 것을 말할 기회가 생겼다는 반가운 빛을. 남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을 가진 사람은 자기 안의 거인을 살아 움직이게 한 사람이다. 


그는 내게 몇 시에 일어나는지, 운동은 하는지 물었다. 서로 묻고 답하는 중에 그가 책상 아래에서 백지 한 장을 꺼냈다. 종이 위에 끄적이며 건강 관리법을 설명하다가 그의 말은 굴곡 있는 인생 이야기로 흘러갔다. 대학교에 다닐 때, 학생 운동을 주도하며 학교 측과 대립하다 무기정학을 당하고. 방황 끝에 발견한 길은 연극이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이 연극배우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들을 향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아버지의 마음은 말기 암으로 드러났다. 


효도 한 번 하지 못한 채로 아버지를 보낼 수가 없는 아들은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여덟 살이나 어린 수험생과 함께 대입 준비에 돌입하는데 중학교 수학책부터 펼쳐야 했다. 첫 모의고사 성적은 거의 꼴찌. 11월이 시험인데 9월이 되도록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꼴찌의 목표는 변함이 없었다. 꼴찌 주제에 최고의 한의예과를 목표로 했으니 주위 사람들이 다 비웃었다. 가족마저 그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꼴찌는 자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종이 위에 그가 그리는 곡선과 글자만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믿어준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한 대학 중 한 곳은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끝내 꼴찌가 상위 0.3 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종이 위에 그린 성적 곡선을 가리키며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그가 물었다. 시간의 흐름과 평형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비약하는 성적 곡선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려면 일정한 지점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륙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자신을 뛰어넘는 힘은 절박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절실한 자기 동기가 없으면 열심히 할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다고.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인데 내게는 그것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는 내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법을 알려주고 성공학 원전이라는 책도 몇 권 소개해 주었다. 나는 건강 관리법을 물었을 뿐이지만 그는 내 몸으로 내 마음을 감지하고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의 주인공이 해주는 말을 듣다 보니 진료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침을 맞는 환자가 왔다. 나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침을 놓고 올 테니 앉아 있으라고 말했다. 



계속

이전 08화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털어놓을 수 없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