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메일을 받은 그에게 듣고 싶었던 말. 앞서 썼듯이 <전화>라는 시에 있는 말. 그에게 메일을 보낸 때를 떠올리면 시처럼 그 말을 끌어내고 싶어 한 마음을 여전히 느낄 수 있는데. 기억은 얼마나 단편적인지. 단편적인 기억으로 전개한 사건은 또 얼마나 비약적인지.
지난번 쓴 글을 읽어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마음이라는 문 앞에 당도하기까지 내 마음의 여정을 슬그머니 따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각들을 비집고 일어나고. 그래서 파일을 뒤져 찾아낸 것은 그 시절 일기.
일기에 의지해 나는 흘러간 마음 굽이굽이를 돌아 그의 맞은편에 앉은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그날은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두어 번 진료를 받은 날이었다. 의사와 환자로 주고받는 말은 건강관리에서 공부법으로 가지를 뻗치며 나아갔고. 그는 최하위를 달리던 성적이 비행기가 이륙하듯 최상위로 비약한 일을, 자신이 실행한 방법과 그 과정에 터득한 지혜를 흰 종이 위에 볼펜으로 쓰면서 들려주었다. 경이로운 체험담을 듣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그는 그 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기적 같은 체험으로 자신이 누군지 발견하게 된 이는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가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을 품고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맞은편에 앉은 내가 잊어버린 나를 기억해 내고 망각 속에 파묻힌 존재를 일으켜 세우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나를 앉혀두고 자신의 재탄생설을 말해준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법이 담긴 문서를 전수하는 마음이 그러니 얼마나 간곡했을까.
그의 말을 다 들은 터에 그 손길이 너무 의외여서 나는 아, 이런 거까지! 하고 생각하는 찰나 얼떨결에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았다. 그것은 내게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그때까지는. 신화 같은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자각했지만 그 순간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시차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가 준 종이가 비결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접어서 책 속에 넣었다. 그때 가방에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막 읽기 시작한『The secret』. 책을 볼 때마다 책 제목처럼 그의 비결이 담긴 종이도 꺼내 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종이 위에 그가 쓴 글자들을 보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 비밀문서를 마침내 책상 위 유리 아래로 밀어 넣었다. 보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눈길이 가닿는 곳으로.
모르는 사이 거기 눈길을 주다가 당신은 누구기에 해내는데 나는 하지 못하는가 생각했던가.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는 성인의 말을 떠올렸던가.
어느 순간 종이에서 죽도록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 글자에 시선을 고정하자, 아버지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도록 효도 한 번 하지 못한 아들이 그제야 절박한 심정으로 죽도록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말이 다시 들려왔다.
눈길이 글자 저쪽으로까지 꿰뚫어 나가고 이윽고 아득한 침묵을 느꼈을 때 문득 공부에 도통한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죽도록 해야 뭔가에 통하게 되지. 그렇게 자신이 죽어야 자기가 살아나게 되지. 그렇지.
공부하는 법을 잊어버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보면서 다니던 그때 누가 나를 그에게 보내었는지. 지하철에서 생각에 빠져 있다가 혹은 책을 보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고도 한참을 더 가서 제정신이 들 때처럼 이끌어주려고 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도 무심히 지나친 것에 뒤늦게 정신이 미쳤다. 내게 찾아온 기적 같은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내버린 것에 후회가 되었다. 그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다음 진료를 받으러 가기 전에 나는 이미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벌써 그에게 달려가 상담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
해준 말과 권해준 책 또한 좋은 약이었다고. 생각에서 모든 것이 탄생한다는 걸 알고는 있으나 부정으로 흐르기 일쑤인 생각을 관리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고. 몸이 힘들었던 까닭은 정신적 압박감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여기저기서 연구 지원을 받은 만큼 좋은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2년 동안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 위기를 느꼈다고. 입을 닫고 귀를 막고 고독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의혹과 실망이 깊어질 뿐이었다고.
흘러나오는 말 속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는 알았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그에게 갔으나 그가 손을 얹은 곳은 내 마음이었다는 것을. 누가 뭘 물어도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내가 그렇지 않고는 있는 그대로 말을 길게 할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진료를 받을 때면 치유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처럼 경청하고 응대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남은 단 한 번의 진료 이후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으니 메일 주소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만남이 좋은 만남이 되도록『The secret』에서 읽은 대로 상상을 실제처럼 느끼며.
마지막 진료를 받으러 간 날. 무슨 말을 하던 끝이었을까. 그는 내게 문제 속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그리고 물었다. 영화 <패치 아담스>를 보았느냐고. 보지 못했다고 하자 동영상을 구했는데 메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게 컴퓨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리고 자신의 블로그를 열고는 멘토링 게시판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어떻게든 이끌어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느끼면서 나는 그와 소통하는 멘티들을 어떻게 만났는지 물었다. 멘티들은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자기에게 멘토가 되어주길 요청했다고 그가 말했다. 환자 멘티는 내가 처음이라고.
멘토가 되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나는 그의 배려에 무척 놀랐다. 그는 자기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디일까 늘 생각하는 사람. 자기 조건이 열악하고 힘들 때도,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남을 생각한다고 사람들이 비아냥거릴 때도. 품은 뜻을 꺾지 않고 묵묵히 실천해 왔으니 그는 내게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발견했을 것이다.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뭔가를 갈구하고 찾으려 하고, 또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몸에 드러나 있었다고.
그는 다음에 오면 자신의 수기가 실린 책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아닌가요?”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물었다.
“진료 받는다는 생각 없이 오세요. 4시 이후면 한가해요.”
그와 계속 연결되기를 바란 나에게 그가 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오세요라는 말을 나는 이미 들었다. 듣고도 정작 그 자리에서 오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번에는 그의 말을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들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에 가로막혀서. 내가 그에게 멘토링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병원 사람들은 어쩌면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보더니 오지 못하면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자기 명함을 주었다.
진료를 받고 나와 문을 닫을 때 보니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의사는 절망 끝에 있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자여야 하고, 의술은 돈을 버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의사. 어떻게 그처럼 숭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버지가 위암에 걸렸을 때 그는 바닷가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햇빛을 다 담아내는 바다처럼 세상 사람의 아픔을 품어 안는 마음을 지니고 싶다는 말이 마음에 떠올랐다고. 그 후 하루도 내 힘이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본과 1학년 때 청각장애우가 장애를 가진 조카들을 키우면서 봉사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입에 올리기 전까지 나는 <패치 아담스>를 알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 그가 어떤 의사를 꿈꾸는지 알게 되었다. 바다 같은 마음을 지니고 싶어 하는 그 의사가 그때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책상 유리 아래 패치 아담스의 무료 병원 사진이 있었으니. 그 사진을 보며 자신의 꿈이 실현된 것을 상상하곤 하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 말을 떠올리면. 그는 무료 병원을 개설하고 꿈꾸던 대로 이상적인 의사가 된 자신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맞은편의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갈 때마다.
그의 명함을 내 지갑에서 꺼낸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스승에게 일신우일신하는 모습으로 다가가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듯이 그에게도 내가 뭔가를 성취하여 할 말이 있을 때 연락하려고 날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달이 차고 기울었고. 해마저 바뀌려 하고 있었다. 어떠하든 새해가 되기 전에 편지를 보내자고 마음먹고서야 지난번 글에서와 같이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편지를 썼다.
미루고 미루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의 답신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스스로 원하고 열망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저는 응답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응답합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그의 진실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꿈을 키우세요.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을 키우세요. 열망하고 갈망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내 안의 힘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가슴속 거인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나를 지켜보며 응원하는 마음을 느끼고 가슴이 벅찼다. 읽고 읽었다. 1월 중에 한번 오세요,라는 문장을. 내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 인용한 <전화>에서처럼 오세요 하고 반기는 마음을. 진료를 마무리할 때처럼 파이팅~!으로 맺은 편지를. 저에게 문학적 감성을 깨워주시네요^^라고 쓴 추신까지도.